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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참고: 에베소서 4장 1-6절
사도 바을 선생님은 문자 그대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갇힘을 “주 안에서 갇혔다.”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위한 죄수”라는 말입니다. -A prisoner for Christ-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슬에 의해 그리스도께 매어있는 동시에, 복음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 때문에 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옥중에 감금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한 마음, 한 뜻된 일치되고 연합된 교회에 대한 비젼을 잃지 않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나 이 자리에 모인 성도님들도 다 사도 바울 선생님의 소원과 같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가운데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발을 부치고 살지만 이 세상 시민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성도들이 믿어야 할 것들을 교훈 해 주셨습니다. 4장부터는 이론적인 설명으로부터 일상 생활과 관계된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특징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물론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종, 국가, 배경, 성별이 다릅니다. 어떻게 이런 다양성 속에 일치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묶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주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십니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이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실 생활에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본문을 중심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지상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나는 이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조금 내려가서 요한 복음 17장 21, 2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이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이 우리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1. 하나가 되는 사랑은 서로 겸손하게 표현됩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 선생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서가 기록된 원어의 뜻은 ‘마음을 낮추는 것’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우리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을 높이시며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하나됨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불화 뒤에는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쉽게 친해질 수 있고 마음을 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자신을 낮추고 나를 높여주며, 돌려 줄 수 있는 존경을 아낌없이 보여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반대로,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다른 사람을 존경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굴하게 굴욕적으로 머리를 굽실거리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은 본래 하나님께서 상대편에게 주신 본질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태도입니다.

2. 하나가 되는 사랑은 온유하게 표현됩니다.
온유룰 영어로는 Meekness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온유를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성품 즉 Weakness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란 말의 본래 뜻은 ‘강한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즉 강한 성품,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자제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휜들레이라는 성서학자는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품’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 19:29)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을 해나갈 때 겸손과 온유를 주님께로 계속 배워 나가야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왜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까? 많은 경우에 서로 부딪힙니다. 힘을 써서 이기려고 합니다. 사회처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그릇된 논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온유와 겸손을 실제 생활에 적용해서 한 마음 한 뜻 된, 일치 단결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일에 힘을 모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가 되는 사랑은 인내합니다.
‘인내’ 즉 ‘오래 참는 것’의 원래 뜻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물러서지 않는 성품을 가리깁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일에 있어서 주는 의미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음으로써 복수할 수 있는 데도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대하여(롬 2:4), 박해자 사울에 대하여(딤전 1:16), 그리고 죄악이 관영한 노아 시대 사람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을 때 (벧전 3:20)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격언에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네가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비난하고 배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서 인내하면서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생을 같이 사는 부부도 다릅니다. 자녀들도 다릅니다. 그런데 교회서 만난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들 간에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 하반절을 보면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하셨습니다. 옷을 입고 살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4. 하나가 되는 사랑은 서로 용납(관용)합니다.
‘관용’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결점과 약점을 발견하고서도 끝까지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신입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은 권면하고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잘못된 행동들이 있을 때는 엄히 경계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언제나 용서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한 실수나 부족한 점은 서로 잘못을 고하고, 사과하고 서로 용서해 주는 분위기가 될 때 주님의 공동체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그럽게 보아주고 대해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외유 내강”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남에게는 부드러우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반대로 자신의 잘못들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럽고, 다른 사람들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그릇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가지고 탓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속에서 나의 연약한 모습도 함께 보는 심정,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회복시켜주려는 열린 마음이 관용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 관용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골로새서 3장 13, 14절을 보십시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은 이상에서 말씀드린 겸손, 온유, 인내, 그리고 관용의 성품을 포괄한 궁극적인 성품입니다.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성도들의 복지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건설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세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가 되는 4가지를 묵상했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많이 성숙된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어 감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이런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겸손한 성도들이 되십시다. 온유한 성도들이 되십시다. 오래 참을 줄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리고 관용하는 넓은 마음, 열린 마음의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이 지역사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빛을 발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이렇게 사랑 안에서 힘을 모아야 제자 삼는 교회의 분위기가 됩니다.

요한 복음 13장 34, 35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러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셨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성도,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을 이루는 교회를 이루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5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참고: 에베소서 4장 1-6절
152 그리스도인의 인생목표. 참고: 빌립보서 1:19-26
153 부르심의 한 소망. 참고: 에베소서 4장 3-6절
154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참고: 빌립보서 1:27-30
155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은사- 참고: 에베소서 4장 7-12절
156 감사와 증거 하는 생활. 참고: 마가복음 1장 35-45절
157 사역자를 세우기 위하여. 참고: 에베소서 4장 7-12절
158 이렇게 삽시다(2) 참고: 에베소서 4장 25-32절
159 목사와 교사의 사역 핵심 참고: 에베소서 4:7-12
160 목사의 기본사역 참고: 에베소서 4장 12-16절
161 성도의 연합이 이루어지려면. 참고: 에베소서 4장 13-16
162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참고: 열왕기 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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