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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인생목표.
참고: 빌립보서 1:19-26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삶의 중심이 자기로부터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온전히 그의 인생 목표가 변했습니다.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이 바뀌었습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하던 그가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게 되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려던 그가 하늘에서 보이신 사명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삶의 방향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입니까?
믿기 이전처럼전 쾌락, 물질적인 풍요, 권력과 명예는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던지, 아니면 선교여행을 하던지 가슴에 간직한 몇 가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을 우리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그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사람들에게 실생활로 본을 보이는 생활을 했음을 우리들은 잘 기억합니다.
그는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본을 보였습니다. 새로 시작 된 교회에 재정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한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나를 내가 너희들에게 보인 본을 따라 살라고 할 정도로 주님을 닮아서 살았습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고 하실 만큼 부끄럽지 않게 사셨습니다.
영적인 성숙도에도 그렇습니다. 실생활에도 모범을 보이면서 살았습니다. 자기가 전도해서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언제나 자기의 영적 동기와 과정들을 잘 점검했습니다. 기억할 것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다가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늘 깨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동기와 과정, 그리고 결과를 얻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일에 증인이 되시다.“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이나 제자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 부끄럽지 않게 사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사역 면에서도 주님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맡기신 바를 충성된 종으로 일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4:7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의 일생에 부탁한 모든 일을 완수했습니다. 사실 그는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영적 분별력을 의식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기도,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삶은 우연이 아닌 바른 선택이 될 때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2.그는 살든지 죽든지, 항상 그리스도가 존귀히 됨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목표를 물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산다고 합니다. 바람직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지식이나 말만으로 끝난다면 그것만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 2:2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라면 자신이 살던지 죽던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 말씀을 보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삶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로마서 14:7-9)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더 알 고 그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라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진수요, 보배요, 의미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의 삶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씀은 내가 순교를 당한다 할 지라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왜 죽음이 그에게 유익합니까?

여기 ‘유익’이라는 헬라말의 뜻은 ‘얻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고통과 질고에서 해방됩니다. 영광스런 승리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날입니다. 그의 삶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계신 곳,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면 죽음이라도 두려움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죽음으로서 그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죽음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 이해합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주는 교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이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에 왔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정복 되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55-57을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사도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죄 짐을 대신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두시는 동안 어떻게 살야야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 전서 15:58을 보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주님을 존귀히 여기면서 살아야 죽음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살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이 부끄럼 없는 사람, 살던지 죽던지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이 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사실은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빌립보 교회성도들을 생각할 때 갈등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아서 그들을 위해 더 열매를 맺는 사역을 하고 싶었습니다(1:22). 그래서 그는 둘 사이에서 무엇을 가릴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3절에 보면 들 사이에 “끼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끼었다는 헬라말의 원래 뜻은 사방이 꽉 막혀서 움직일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면이 포위된 상황을 말하기도 했습니다(눅 19:43).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런 단어를 사용했음을 볼 때 그의 갈등이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욕망보다는 주님의 뜻과 성도들의 유익을 앞세웠습니다. 24절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만일 산다면 어떤 유익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있을까요?
“믿음의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진보’라는 단어는 군대가 행군을 더해나가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가서 방해물을 제거해 버리는 것을 뜻할 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에 거함으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성도들은 이단과의 싸움에서 핍박과 환난에서 성도들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대신에 디딤돌을 놓아주기를 마음에 소원했습니다.

또한 “기쁨”이 있을 것을 생각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중도 들고, 필요한 물품들을 위해서 에바브로디도를 파송 했습니다(2:25-27. 4:10).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지신의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울을 돕다가 병이 들어서 거의 죽게된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눈물어린 사랑과 헌신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면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고, 사랑의 교제를 계속하게 되며, 교훈과 양육을 계속할 수 있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26절을 보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가 살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고, 성도들의 유익이 되고 자랑이 되기 원함입니다. 얼마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왜 살고 싶습니까?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산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미를 발견한 삶에는 미흡 할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자신을 줄 수 있는 삶, 자신의 유익을 줄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할 줄 아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살고자 했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목표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썼습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사나 죽으나 주님이 존귀히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교회를 이루는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나 세상 사람들에게서나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Number Title Reference
15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참고: 에베소서 4장 1-6절
152 그리스도인의 인생목표. 참고: 빌립보서 1:19-26
153 부르심의 한 소망. 참고: 에베소서 4장 3-6절
154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참고: 빌립보서 1:27-30
155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은사- 참고: 에베소서 4장 7-12절
156 감사와 증거 하는 생활. 참고: 마가복음 1장 35-45절
157 사역자를 세우기 위하여. 참고: 에베소서 4장 7-12절
158 이렇게 삽시다(2) 참고: 에베소서 4장 25-32절
159 목사와 교사의 사역 핵심 참고: 에베소서 4:7-12
160 목사의 기본사역 참고: 에베소서 4장 12-16절
161 성도의 연합이 이루어지려면. 참고: 에베소서 4장 13-16
162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참고: 열왕기 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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