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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빌립보서 1:27-30 |
사도 바울은 그가 다시 살아서 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현실은 언제 순교를 당할지 모르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므로, 이런 상황에서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만나게 되든 안되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교훈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거듭난 성도들은 그에 따르는 생활을 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고 부탁하셨습니다. “생활하라”는 말의 근본 뜻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 “시민권을 가치 있게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이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특별도시로서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로마밖에 있는 로마”라고도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시민임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몸은 희랍지방에 있지만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 시민답게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지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런 의무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특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삶입니다. 만 왕의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삽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삽니다.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과는 비교가 안 되는 특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27절 이하에서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성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협동하며 삽니다.(27하).
27절 하반 절을 보면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협동이 시작됩니까? “일심으로” 해야 합니다. “일심”으로라는 말씀은 “한 마음 한 뜻”을 말합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영어로 보면 ” In one spirit with one mind"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만 한 마음이 가능합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십니다. 누가 높으냐고 다투던 사도들이 성령님으로 충만함 받은 후에는 서로 협력하는 동역자들이 되어 초대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교회가 내적으로 불화와 불평이 공공연히 진행되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복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비추어서 좋은 영향력을 발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서서“라는 말은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땅을 꿋꿋하게 밟고 창과 방패를 들고 대적을 밀어 부쳐 나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반석 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살 때에 복음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습니다. 성도 개인 개인이 주님과의 관계에 확신이 없어서 세상 풍조에 흔들흔들 거리면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있겠습니까? “힘을 합해야”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NIV 성경을 보면 "Striving side by side"라고 했습니다. “Strive"라는 말은 “Try very hard"라는 뜻입니다. 전투를 할 때 대오를 나란히 해서 서로를 의식하면서 갑니다. ”협력한다“는 이 단어는 원래 검투사들을 연상하는 말입니다. 검투사들은 공동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나란히 서서 나아갑니다. 공동전선을 펴나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보호해 주면서 역경을 돌파하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즉 Team work이 결코 쉽지 않음을 봅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팀웍은 우리들이 꼭 유념 해야할 중요한 복음 전도의 단위입니다. 우리들이 잘 부르는 찬양처럼 ”혼자 소리로는 못해도, 둘에 소리로는 못해도 둘과 둘이 모여 강한 함성 될 때 저 어리석은 자 깨우칠 수 있네.“
우리는 모두 실리콘 밸리 열린 문 교회성도들로 모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굳은 믿음의 생활을 날마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2.성도들은 담대하게 삽니다(28).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종류의 대적자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도시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유대인들에게서 심한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던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국민으로 살고있었지만 로마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잠시 이 악한 세상을 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디모데 후서 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것이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핍박을 받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신앙이 강해집니다. 쇠를 불에 달구어서 망치로 단련해야 강한 쇠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는다면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임이 증명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누가 고난을 받겠습니까? 반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핍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입증되는 것입니다. 전투에 나가는 군인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전진하는 담대함이 있어야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물론, 그에 따르는 대가는 있습니다. 칭찬보다는 핍박이요, 안전보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01:13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우리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타협합니까? 아니면 담대하게 그리스도인임을 말합니까?
3.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도 고난받는 삶을 즐겁게 삽니다(29,30).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을 통해서만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주님을 따르면서 배우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고난을 받게 됩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뒷부분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너희에게 주어졌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을 읽으면 신앙생활을 중단하고자 하는 분들이 계실 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 9:16을 보면 사도 바울울 부르신 하나님께서 눈먼 바울을 고치리라고 아나니아를 보내시면서 주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0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의 고통까지라도 고난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겠다”(골로새 1:24)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더 많이 고생함으로서 성도들이 덜 고난받기를 바랬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하나의 특권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도 바울 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많은 매를 맞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음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사도행전 5:41). 빌립보 교회에도 사도 바울과 “같은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 도시에서 당하는 고통이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으로 편한 시대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단어가 어색합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정말로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생활이 믿음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을 자르려면 고통이 따릅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도 고통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평안히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일에 따르는 결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부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십니다.
한 영혼이나 가정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하여 전도해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실 인간적으로는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 양육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1-2년간 꾸준히 한두 사람을 양육해서 세례를 받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성장하게 하는 일이 결코 쉽습니까? 아마도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적 자녀를 키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척 교회의 일원이 될 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고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거점을 확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적 싸움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개척 교회를 꺼립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군이 되어 봉사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수고와 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불신 국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선교사로 간다고 하면 너는 안된다고 합니다. 부르심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너무 고생하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얼마나 이율 배반적인 신앙 생활입니까?
우리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무엇으로 입증됩니까? 삶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십니까? 우리교회가 복음을 정하는 일에 협동하시지 않겠습니까? 담대하게 사역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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