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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이 없다고 한 사도 바울
빌립보서 4장 1-13절
요절 :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9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3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제 3 과를 통하여 푯대를 향하여 돌진해 나가는 사도 바울 선생님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짓 교사들에 대한 그의 예리한 비판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물론 오늘 우리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그 교회 내부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화의 조짐이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있어서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에 대하여 권면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만족의 비결과 헌금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1.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1-7).
2.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8-9).
3. 불가능은 없다(만족한 삶의 비결) (10-13).
4. 헌금에 대한 사도바울의 자세(14-20).
라는 제목을 가지고 연구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배울 본문은 빌립보 교회에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젊은 선교회로서도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때 깊이 묵상해야 라리라고 믿습니다.


중심 되는 말

1.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1-7)

1) 주 안에 서라(1-3)

4장 1절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을의 빌립보 교회에 대한 넘치는 마음이요,
들째는 사도 바을의 권면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을 지독한 사람, 또는 냉혈 인간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색하고, 남을 미워하고 그리고 심술 사나운 논쟁만을 일삼는 노인은 아닙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3장까지 공부한 결과 그는 사랑과 동정과 격려의 구구절절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얻은 빌립보 교회를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 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으며 굳게 살아가십시오"(공동번역 4:1)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루디아며, 옥사장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귀신 을렸다가 나은 여인과 성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의 역사의 진보를 위하여 수고하며 협력하고 성장하는 빌립보 교회를 볼 때,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할 때 비록 어려운 옥중 생활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지만 그들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격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 받은 값진 면류관처럼 보배롭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칭찬과 아울러 권면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하시면서 그 앞에 “그러므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좀먹는 무리들에 대하여 경고하셨고, 끝 부분에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 옴으로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서라”고 한 이 말은 아주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이 말을 “물러서지 말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나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검투장에 나가 적과 맞서 싸우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용기와 굳센 힘이 있어야 시합에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전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10-20).

때때로 우리들은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봉사하기도 합니다. 생활이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자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리를 하고 뭉기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바리새인처럼 되고 자기 중심적인 종교적 탈을 쓴 인간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고 썩은 동태 눈과 같은 신자가 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주 안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인 세상의 유혹이 싸이키 조명처럼 현란하고, 곳곳에 설치된 새 덫처럼 발 붙일 곳 없는 유혹의 늪에서 승리하며, 사탄과의 싸움에서 대적을 무력하게 하는 비결은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서는 것’ 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교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쓰라린 많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했던 빌립보 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점검해야 할 문제입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빌립보 교회 내에 피차 사랑을 잃은 두 여성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두 여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도 바울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3절을 보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여성은 화목했고, 피차 열렬하게 협동하고 또한 사도 바울은 물론 그의 동역자들에게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불화에 대하여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뜻을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들은 영적 일꾼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랑과 화목대신 불신과 의견 충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불화가 시정되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방해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파괴요인인 것입니다.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개인과 개인이, 그리고 온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 비결은 구성원들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란 말을 빌립보서에서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마음은 곧 교회의 유익을 개인의 유익보다 도 더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피차 자기를 낮추고 화목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빌 2:3,5). 다시 말해서 이것은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모든 영광과 자기의 이익을 스스로 흘려 버리는 마음입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또는 온 교인들이 하나되는 비결은 실제적으로 서로 낮아지는 본을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서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두 여성만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권면 하셨습니다. 두 여성이 서로 화목하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이가 멀어진 이들은 제 삼자의 도움과 격려가 요청됩니다. 모임에 불화와 시비가 있는데도 그것을 보고 아예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시비에 말려들 필요는 없지만, 이 시비를 해결 하기 위하여 일할 책임은 있습니다. 모임의 화목을 등한히 할 때 사랑의 연합이 무너집니다. 구성원 전체가 이러한 일에 무책임해질 때 공동체는 병듭니다.

2) 주 안에서 너그러워라(4-5)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기쁨과 만족 그리고 평화를 찾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복을 발견하는 방법을 우리들에게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생 모두를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란 무엇일까요?
4절과 5절을 읽어 보십시오.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기뻐하는 삶(희락)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요 의무 중 하나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기 원한다면, 슬퍼하는 삶보다는 기뻐하는 삶이 더욱 유리합니다.

여러분이 본문을 읽으시는 중 우리들이 기뻐해야 할 시간의 길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핍박을 당할 때.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죽음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참된 기쁨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 얼마만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비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체를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기쁨의 비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5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는 두 가지 열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내부적인 태도에 대하여, 5절에서는 외적 태도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축복이 되기를 노력하는 일 없이는 참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인내, 온유, 온순, 분별, 인자, 아량, 관대함이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양보할 때 끈기 있게 양보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의함을 당할 때도 원수로 갚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핍박자에게 까지도 친절로 응답하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신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관용과 친절의 생활을 증거하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암시해 주십니다. “주께서 가까우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핍박이나 고생 중에도 실망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실 상이 가깝습니다.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될 날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고통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영원한 영광과 환희를 맞이할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합시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핍박과 고통과 눈물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이 가깝습니다!

3) 주 안에서 기도하라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면, 근심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근심에 대한 사도 바울의 처방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들에게 무사태평하게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신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평생토록 근면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것 때문에 마음이 착잡하게 되고 또한 쓸데 없는 걱정근심이 생기게 되는 그러한 걱정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염려는 우리들의 영적인 힘을 약화시키고 영적 행복감을 저하시킵니다. 염려 때문에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할 우리의 생각과 기도가 오히려 끌려 내려오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나오는 것과 같이 염려는 좋은 씨가 땅에 떨어져 자라다가 그 기운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원숙한 생활을 하려고 한다며, 거룩한 행복과 가치 있는 생활을 하려고 할 것이면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범위는 아주 넓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어려움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온갖 가능성을 지닌 안간인 우리들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본문의 후반 절은 이것에 대한 대답을 주십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룀”으로서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염려의 올무에서 벗어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나 염려 중 양자 택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만사를 염려하게 될 것이며, 또한 만사를 주께 맡기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초월하여 근심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있지 않으면, 이 세상 일과 그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말씀의 약속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물이 없어 목마를 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만나와 생수를 얻었습니다. 민족의 활로를 뚫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을 있을 때에 적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적군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냈습니다. 왕은 이 통첩을 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보이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셨고 나라를 구원 하셨습니다. 다니엘도 기도로 문제를 해결한 분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일, 신앙성장의 일,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의심을 물리칠 수 잇는 믿음, 소망,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크고 작은 일상생활의 모든 일들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염려 때문에 감사와 찬송을 못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살펴 보면 우리가 어떠한 조건에 있든지 염려할 조건보다는 감사할 조건이 더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4절에서 행복의 비결은 범사에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5절을 보면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강이란 기쁨과 기도의 결과로 오는 것이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평강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평강을 만드신 분이시며,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게 될 때, 우리는 평강 그 자체를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평강 그 자체에 들어가게 됩니다. 타락한 아담 이후에 인간은 평강을 잃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탄과 화평하고 하나님과는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인간은 사탄과 싸워야 하고,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2 천여년 전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말씀을 좀더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을 기뻐하는 마음과 이웃에 대한 관용,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나는”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의 위대함과 온전함 그리고 그 영광을 다 이해하고 헤아려 알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지적 능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놀라운 이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마음과 생각을 평강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대답 하십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에게 염려와 근심이 엄습할 때,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놀라운 평강의 근원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마음의 평화가 보장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생활은 쉴 사이 없이 요동치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수가 있을까요?
-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음 곧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때 마음의 평화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심을 알 때에야 마음의 평강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과 생활에서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생활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보장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평화를 가지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2.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8-9)

빌립보서 4장 8,9절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서는 도덕적 의무를 말하며, 9절에서는 그 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의 의무에 관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행동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를 아주 광범위하게 들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도덕적 문제에 관한 목록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음란하고 부도덕한 신을 예배하던 사람들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신들은 살인과 거짓말을 자행하는 거짓 신이었습니다. 이런 부패한 환경에서 새로운 신자가 된 성도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여러 도덕적 의무들을 지적하면서 “무엇에든지”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무려 6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목록들의 실천 장소는 우리가 사는 세상 한 가운데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고 일하고, 그리스도와 아웃을 봉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은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추상적, 이론적인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은 목적이 있는 것이며, 그 목적은 실천적인데 있습니다. 가르침은 행할 때 열매가 열립니다. 그럴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3. “불가능은 없다”는 사도 바울(10-13)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큰 소원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얻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다 얻었노라”고 말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참 만족을 알았습니다. 언제나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길고 긴 실망과 불만의 연속선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의 가장 부요한 것으로 충만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빌립보서 4장 10절부터 13절을 보십시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매우 만족하게 사는 분이었음을 봅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깊은 평안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어떤 생활 형편에서든지 자신을 그런 형편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배웠습니다.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자기를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주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더 가까이 나가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것들을 “배웠노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족하는 비결이 사도 바울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이 비밀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닥치는 인생의 경험이 사도 바울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 때부터 자족하는 사람으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이 사실을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족이 그의 생활 환경에 지배 받지 않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13절에서는 “모든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가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변함없이 만족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는 생명의 샘은 어떤 형편에서도 결코 마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만족이란 물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만족을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만족을 얻고 아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빌립보서 4장 10절 말씀을 보면 “내가 주 안에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싹이 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헌금을 받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뿌린 복음의 밭에서 성숙하는 믿을 보고 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13절을 보면, 그의 자족의 비결이 명약관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편에 있을 때 우리에게는 자족하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게 힘을 주시는 자”라고 그는 묘사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자족함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3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놀라운 경험은 몇몇 사람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비결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비결은 평화와 만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신앙에서 옵니다(요한 14:27).

4. 헌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자세(14-20)

1) 헌신의 자세로서의 헌금(14-18)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다는 말을 즐겨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즐겨 희생해야 한다는 말을 거북해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여러 차례 도왔습니다. 물질적 청지기로서 복음 역사에 그들 나름대로 헌신을 했습니다(15). 본문은 헌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이 나타나있습니다. 헌금은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들의 희생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헌금 하기 쉽습니다. 헌금을 하지 않으면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이 생활을 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헌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헌금을 예배 참가비 정도로 내 던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 값 지불하듯 합니다. 교회에 고용된 일꾼의 임금 지불하는 기분으로 헌금하기 쉽습니다. 사실 이런 조건들이 헌금의 진정한 뜻일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헌금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표시로서의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예배 시에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 말씀을 듣고, 찬송을 불러 올리는 것이 복인 것처럼 역시 헌금도 복인 것입니다.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책임인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도 기도와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을 세 분야에서 복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 먼저, 믿는 자에게 복이 됩니다(14). 이 복은 “함께 교통하는 복”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보낸 헌금은 교제(Fellowship)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보내온 헌금을 통하여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17절 말씀을 보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유익”이라는 말은 상업에서 쓰던 헬라 말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헌금을 한 사람은 그 헌금으로 인하여 더 풍부하게 되는 법입니다. 잠언 11정 25절을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9장 17절에도 똑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9장 11절도 이와 비슷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 18절 말씀을 보면 이런 헌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헌금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물은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오는 현신의 표입니다. 헌금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향내 나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헌금은 헌금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합니다.

2)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19-20)

유명한 전도자 D.L.무디는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당좌예금 통장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경제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하나하나 다 채우실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쓸 것을 채워 주시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19절에서 하나님이 복 주시는 정도를 살펴 봅시다. 사도 바울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요로운 넓이와 길이를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이 큰 부요함을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부요한 복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은행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신앙이 있을 때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늘 은행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늘의 재물은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에게만 공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보화의 근원이시며 공급자이십니다(골 2:3).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젊은 선교회에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순종하며 살면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우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두려워하지 맙시다.

20절을 보면 “아멘”이라는 단어까지 사용된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금까지 도우시고 또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충만한 찬송의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사랑하는 젊은 선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영광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모임의 모든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맺는 말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인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21절과 22절은 안부요, 23절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마지막 부분을 사랑스런 말로 맺고 있습니다.
신약 성서에는 그리스도인을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제자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권위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대로 ‘성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구별된 생활’입니다. 성도란 말의 중심 뜻은 곧 헌신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란 하나님께서 어떤 거룩한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호칭이 아니듯, 헌신이란 어떤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성도다워야 하며 죄와 이 세상의 것들과 구별되어 그리스도께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2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감사하는 말로 이 편지를 끝맺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는 말씀 속에 빌립보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깊은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특별히 소원한 것은 빌립보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갖기를 원했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함께 계시면 생명수의 강이 흘러 넘칩니다. 주님은 만유의 주시오, 우리들의 새벽 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Number Title Reference
7 불가능이 없다고 한 사도 바울 빌립보서 4장 1-13절
6 제3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3:1~21
5 제2과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30
4 제1과 고난중에서도 기뻐하는 사도바울 빌립보서 1:1~30
3 준비공부 문제지
2 빌립보서 서론
1 빌립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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