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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이민을 떠나면서
참고: 룻기 1장 18-22
어느 주일날 아침 60대 어머니와 40대 아들과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얘야 교회 늦겠다. 어서 가자."라는 재촉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면서 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 장로님의 판에 박힌 준비 안 된 기도를 듣기 실어서.
- 성가대의 준비 안 된 불협화음의 찬양이 실어서.
-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교회에 오실 때 아마도 이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아들의 어이없는 말에 어머니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 안식일은 주님을 예배 하도록 제정하신 것이다.
- 사람을 보고 예배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신자의 의무이다.

누가 이기었을 것 같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한 분이 목사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교회에 가기가 싫어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인간인데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일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들음에는 귀로 스쳐가는 태도로 듣는 사람도 있고, 깊이 마음에 새겨듣는 분도 계십니다. 어떻게 듣는 분들에게 말씀이 살아서 역사할까요?

저는 요사이 에스겔서를 묵상하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주전 6세기에 바벨로니아로 잡혀간 유대 백성들에게 예언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면 잘 들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 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을 남기 없이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분들도 계시고 그냥 시간을 지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는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교인들이 20분만 지나면 시계를 보기 시작하고 30분이 지나면 시계를 손목에서 빼어서 손에 들고 흔드는 교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실리콘 밸리 열린 문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 가운데는 그런 분은 안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이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이민을 떠난 사람들.

오늘 분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지금의 이스라엘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해서 정착했습니다. 그 후에는 그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백성을 돌보고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사라고 합니다.
이 룻기는 사사들이 다스리던 어느 때에 이스라엘 백성가운데서 외국으로 이민 간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은 나오미 이었습니다.

이민을 간 동기는 그 땅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격돌하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지금 반 이스라엘 데모로 연일 수 만 명씩 데모를 하는 모압으로 갔습니다. 현지는 요르단 지방입니다.

이민 간 가정의 가장 이름이 누구입니까?
엘리멜렉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입니다.
그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가문에서 났습니다. 그의 재산을 무를 자가 큰 부자인 보아스라는 사실만 보아도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엘리멜렉이 이민 간 이유는 우리들이 이 땅으로 온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근을 피해서 갔습니다. 하와이 사탕 수수밭에 왔던 첫 이민자들도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민선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민 간 그가 원했던 것들이 성취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민이라는 장소의 이동이 곧 그 가정에 행복을 기약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딸에게서 나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갈 때 통로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적으로 부패하게 한 민족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압 족속은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그 민족은 그모스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의 땅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입니다. 구약시대에 이름은 그의 인격을 반영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해서 짓기도 하고, 그의 삶이 바뀌었을 때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위기를 만나자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약속의 땅에 머물기 보다는 고통을 피하여 잠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곳으로 장소를 옮긴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환경만 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십니다. 그는 자녀들과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환경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왕이라는 뜻이지만 생애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더라도 일단 안정과 풍요를 기대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선택입니다. 바른 선택입니다.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환경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어려움을 견디어 나가는 선택입니다. 이 선택을 잘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전적이 위탁입니다.
엘리멜렉의 선택이 현명한 것이었을까요? 만일 현명하지 않다면 왜 그럴까요?

2.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흰옷을 입고 연탄 광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일한다면 그 옷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언약을 버린 결과 그는 비 성서적이 선택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7장 3절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 섬기는 일에서 떠나게 됩니다. 자녀들도 자연히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남자가 이기지 못하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데 부인과 자녀라고 합니다.
저도 살아보니 그 말에 수긍이 갑니다. 오뉴월에도 서리가 선다는 여인의 눈매 앞에서 떨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성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게 하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이라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부들을 얻었습니다. 사실 모압과 베들레헴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닙니다. 자부를 얻으러 보냈는데 거부를 당했는지, 이민 생활을 해왔지만 별로 거둔 것이 없어서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그들의 결정은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여성이 예수님을 믿으면 남편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믿고 부인이 믿지 않는 경우에는 부인의 종교를 따라가던지 아니면, 무종교자로 전락하던지 하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 선생님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멜 수가 없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3. 그들은 통곡의 눈물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생각으로는 제명을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편 88:5) 반면에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을 복으로 보았습니다.
룻기 1장을 보면 엘리멜렉이 죽고 그 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남아있었습니다. 후손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이 후대에 전하여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가 베들레헴에 남긴 분깃을 무를 자가 없게 됩니다. 즉 조상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후손도 없고 조상에게는 못할 일을 한다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사기 21:25절을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고 하지만 자기의 소견에 좋을 대로 한 엘리멜렉의 인생 결말이 무엇일까요? 환경의 어려움이 그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인간의 처절한 실패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의 길을 마련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민 길을 남편과 함께 떠나서 사는 동안 나오미는 최선을 다해서 가정의 번영을 꾀하였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분노, 절망, 불안, 후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속하시다고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두 며느리를 볼 때마다 눈물과 한숨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있는 나오미를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향으로 삶을 조정해 나갔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고향 땅에 관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고향 땅의 소식에는 절망해서 떠났던 땅에 하나님께서 풍년을 주셨다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빈손일지라도.

20절 말씀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쓰라린 인생 경험과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는 반대로 마라 즉 ‘쓰다’라고 그의 이민 생활의 결과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실패도 고난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오미가 삶의 터전을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의 땅으로 돌림으로 어떤 결과가 나온 지 아십니까?

자부인 룻을 얻었습니다. 이 자부는 보통 여인이 아닙니다. 자부이면서도 신앙의 동역자였습니다. 후한 후원자인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룻을 통해서 손자 오벳을 얻었습니다. 대를 잇게 되었고 다윗 가문을 이루었고 그 혈통을 따라서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복음이란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분은 안계신가? 평안, 물질, 보이는 것등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상 숭배의 문화 속에 계신 분은 안 계시는지요?





Number Title Reference
79 성경을 묵상하는가? 참고: 디모데 후서 3:14-17
80 새 해, 새 역사 참고: 에스라 1:1-11
81 쉬지 말고 기도하라. 참고: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82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하신 예수님 참고: 마가복음 1:35-39
83 죄를 사하여 주심을 믿습니다! 참고: 에베소서 2:1-10
84 모범이 되십시오! 참고: 베드로 전서 5:1-11
85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참고: 빌립보서 1:1-2
86 온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 참고: 시편 138:1-8
87 역 이민을 떠나면서 참고: 룻기 1장 18-22
88 위로부터, 안으로, 밖으로 참고: 골로새서 2장 6,7절
89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참고: 출애급기 3:1-10
90 감사, 감사 또 감사 참고: 골로새서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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