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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참고: 로마서 8:29-30
어느 집회에서 주님을 영접한 자매님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몇 달 전에 제가 주님을 영접한 사실을 아시지요?” “예” “그런데 예전 얼굴이나 지금얼굴이나 뭐 변한 게 없어서 실망이에요. 전 많이 예뻐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왜 그렇게 생각하셨지요?
“아니, 목사님!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구절이 있지않아요? 그 말씀을 들으신 목사님은 “예, 그 말씀은요, 주님을 모시고 계속 사시면, 예뻐지는 정도가 아닌 주님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 거룩함, 즉 진,선,미를 초월한 모습으로 변할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좋을거에요”라고 답변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은도 오래 같이 살면 서로 닮습니다. 마찬가지고 우리가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면 살수록,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닮아 거룩한 삶과 인격으로 변하시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감화 역사하심이 있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리스도라 주라 시인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오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인격과 행위의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로마서 6-8장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성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성화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성경은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그런데 이런 성품이 되려면, 제일 먼저, 주님께 나와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신자들이 인생의 열쇠를 주님께 드림으로부터 ‘거룩한 삶’ 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한 신자가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자연히 그의 인격 또는 성품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품의 중요성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생활 사회 생활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성품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줄 압니다. 성품의 성숙함이 없을수록 인간 관계에서 잦은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성숙과 차이점의 마찰은 결국 혹독한 대가를 불러옵니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 갈라서고 맙니다. 부부들이, 친구와 직장 동료들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성숙한 성품은 성격이 다른 사람들을 맞물릴 때 윤활유 역학을 합니다. 여러 가지 부품이 맞물림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마찰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늘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것도 그래서 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형제간에 때로는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피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미국 폭력 범죄의 약 55%는 가정 폭력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피살자의 90%이상은 아는 사람들에게 죽으며, 그 중에서 45%는 친척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 질수록 갈등이 불거질 기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와 부모간에 가장 많은 갈등을 겪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갈등을 느끼지 않으려면 안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사회의 최소 조직에서 부부의 역할을 빼내면, 고장은 시간 문제입니다. 가령 남편이나 아내가 갈등을 면하려 배우자를 버리면 순간의 스트레스 해소가 고스란히 자식들의 고생으로 돌아옵니다. 자식들은 한쪽 부모 없이 깊은 상처와 불안정한 삶에 직면합니다. 문제가 더 악화 될 뿐입니다. 건강하고 오래된 관계가 지속 된다는 것은 상호간에 온전한 성품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갈등 많고 단명한 관계라든지, 갈등 많고 오래된 관계는 성품의 결손의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가운데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보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성품을 키울 수 있는지를 살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잠시 에베소서 4장 2절 말씀에 나타난 4가지 성품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숙한 성품을 가진 성도의 삶의 첫 모습은 겸손입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자신을 정확히 볼 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과소평가도, 과대 평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생각의 중심에 놓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면 “네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러분 각 사람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자가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겸손은 성경적이고 정직한 자기 평가를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타인 중심의 희생적 관계, 섬기는 삶, 자신에게 삶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2)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의 두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라는 말은 ‘사려 깊다’는 뜻입니다. 자제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기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힘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이 약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시기 때문에 자제하셨습니다.
자제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들은 안전한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가치 있고 중요한 인간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때때로 겸손하고 온유하면 바보같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3) 주님을 닮아가는 세 번째 성품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꾸준히 견딘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건 좀처럼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로에서 우리를 조롱하는 사람이 있어도 응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공격하던 그것 때문에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편보다 우월하다고 보여질 필요가 없습니다.

4) 마지막으로 용납입니다.

용납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변덕, 잘못, 특이한 성격까지라도 참아준다.”는 뜻입니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발휘한 후에도 그저 ‘참아주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 같은 사람도 참아 주셨습니다. 거룩한 성품으로의 변화는 수도원에서 성숙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빚어집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 살아가는 분들이 모인 곳은 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있을 뿐입니다.
이상의 성품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성품은 실제 인간 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함으로 성장됩니다. 훈련과 연습과 반복이 필요합니다. 이상의 네 가지 태도에 순종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빚어가십니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연합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에베소서 4장 3절 말씀처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숙한 성품으로 가는 길을 막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과 원한 관계, 원수 맺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성품을 닮다가는 데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리이까.”(마태 18:21) 베드로도 우리와 같은 문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용서란 정말 적절한 것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적인 삶의 태도가 우리를 성화의 길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그 중에서도 원수 맺는 것, 용서하지 않는 태도는 치명적인 손상을 줍니다.

기억하십시다!
미결의 상처만큼 성품의 퇴보에 기여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성장하든지 퇴보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원한은 성품의 암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잊어라!” 말은 쉽지만, 우리 마음에는 정의, 보복, 앙갚음을 해야 한다고 저항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범죄의 피해자라는 인정과 공감을 원합니다. 범인이 준 상처와 손해가 원상복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둘 다 사람들에게 보상 받기는 어렵습니다. 망가진 평판을 회복하기 힘든 때가 많습니다. 비판과 무시의 세월들을 만회할 수 없습니다. 재정적 변상으로 보상될 수 없는 정신적, 정서적 요소가 있습니다. 늘 어느 정도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은 채 남습니다. 회수하려는 노력은 부질 없는 짓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상처를 보호하고 공격적이 됩니다. 이런 경우는 자기 중심적이 되어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아니면 상처와 고통을 묻어둡니다. 이런 경우는 우울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용서는 가해자에게 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원수 같은 사람에게 베푸는 혜택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것은 주님이 말씀은 나를 위해 마련된 선물입니다. 내가 내게 주는 선물입니다. 용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상대편이 아닌 베푸는 사람입니다.주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세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하나님께 피해자를 소송하십시오.

예수님께서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용서는 빚의 탕감과 같은 것입니다. 두리 뭉실한 용서는 구체적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잃은 것을 정확히 짚어서 계산하지 않으면 탕감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부분에서 실패합니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며, 손해를 본 것을 짚어낸 후에 이 문제를 사람에게서 보상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속속들이 아뢰십시오.

2)하나님 앞에서 그 소송을 취하하십시오.
용서는 감정이 아님을 잊니 마십시오. 용서는 결단입니다. 단지 빚의 탕감을 선택하고 하나님 앞에서 취하하십시오. 가해자에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분분의 경우 그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_______가 제게서 ______을 빼앗아 갔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문제에 집착해서 보복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이 빚을 탕감하기로 결단합니다. _______는 저에게 더 이상 빚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용서 하신 것 같이 저도 ______를 용서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 멘.

3) 소송을 기각하십시오.

마지막의 골자는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하나님께 소송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편에게 받을 것이 없음을 굳게 붙들면 시간이 가면서 감정이 바뀌기도 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것은 감정이 용서의 결단에 자동적으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과거에 상처 받은 감정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직면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죄를 짓거나 재 소송을 제기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기억은 용서의 적이 아닙니다. 기억은 기억일 뿐입니다.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이 그 영향력을 결정합니다. 기억을 내가 누리는 용서를 기뻐하는 기회로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진정한 치유를 경험하면 한때의 부정적인 기억도 기쁨과 감사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아픔, 상처, 불이익을 주신 분은 안계십니까? 찾아가셔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변상하실 것이 있으면 변상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큰 고통과 상처와 불명예와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신 분이 있습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는데 주님께서 탕감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건강한 가정을 이루시기 원하십니까?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의 중요성을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다! 우리들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의 성품을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 가고 있습니까? 온유하신 주님을 닮아 가십니까? 오래 참으시는 주님을 닮아 갑니까? 부족한 우리 같은 죄인을 용납하신 주님을 닮아 가고 있으십니까?

한번은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성도 가운데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상대편을 용서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목사님 “그 인간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어요”라고 대답하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당신도 주님께 용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답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주님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분은 안계십니까? 오늘 용서하십시오! 주 안에서 평화를 누리십시오! 그래야 주님의 형상을 본받아 사는 자녀로 성숙해 집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222 사역자를 세우기 위하여. 참고: 에베소서 4장 7-12절
221 모으는 자냐? 헤치는 자냐? 누가복음 11:14-26
220 주님의 부활, 우리의 변화 요한복음 20:19-23
219 하나님의 동역자들 고린도전서 3장 5-9절
218 역경에도, 순경에도 사무엘하 19:31-40
1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 참고: 창세기 3:14-24
2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참고: 로마서 8:29-30
3 새 해, 새 결심 참고: 여호수아 3:1-6
4 제일은 사랑 참고: 고린도 전서 13:13
5 무덤을 넘어서 참고: 에베소서 4:7-10
6 십자가의 도 참고: 고린도 전서 1:18-25
8 주지말 분노, 품지말 분노 참고: 에베소서 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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