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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말 분노, 품지말 분노
참고: 에베소서 4:26,27
저 는 지난 주일(2007년 4월 15일) 저녁부터 버지니아에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목사님들을 말씀으로 섬기는 기회가 있어서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버지니아로 내려갔습니다. 월요일 오전 버지니아 휘어펙스 카운티에 있는 버지니아 택 대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를 이용한 끔찍한 살인 사건의 소식에 접했습니다. 제가 묶던 곳이 바로 범행이 저질러진 카운티였고, 범인이 다닌 고등학교 부근이었습니다. 이 끔직한 사건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범인을 포함해서 33명의 사상자와 29명의 부상자를 낸 전대 미문의 총기 살인사건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먼 이국 땅에 와서 사는 우리들에게 더 큰 충격이 되는 것은 8살 때 이민온 1.5세 영주권을 가진 조 승희라는 23세된 대학생이라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 부모들이 보다 잘 살기 위해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기회의 땅으로 1992년도에 이민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경악하는 것은 그가 NBC 방송에 보낸 우편물에 보낸 동영상에서 한 말들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난한 자, 억눌린자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고 싶다.”고 하면서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모세처럼 “물을 가르고 자기 백성을 내 보내는 자”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신문을 보니 범인과 가족이 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혐오했습니다. 특히 부자들을 혐오했습니다. 그가 살던 주위 사람들도 인사를 하지도 받지도 않던 고등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교 기숙사에 함께 묶고 있는 동료들과도 인사도 하지않고 지냈다고 합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도 썬그라스와 모자를 쓰고 강의를 받기 때문에 교수가 계속 지적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의 의견은 범인은 정신 분열증과 복합적 정신 장애, 피해 망상과 과대 망상증에 걸려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 낮밤없이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땀흘려 고생하고 희생하는 우리 부모된 사람들로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큰 경고를 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부터 5장 4절 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벗어 버려야 할 여섯개의 구체적인 생활 양식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을 내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26절 초반절을 보면 분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는 ‘Anger’입니다. 인류의 첫 살인사건도 이 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인류의 첫조상인 아담의 두 아들간에 일어나 살인 사건은 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동생 아벨의 제물은 열랍되었는데 가인의 제물은 열랍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안색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창 4:5)라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언제 분이 납니까?
거부될 때 분이 납니다. 거절감은 인간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들의 경험을 돌아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느낌이 엄습할 때에는 특정한 상황이나 상대편에게 과잉 반응을 보입니다. 거절감이 해결되지 않은채 쌓이게 되면, 이런 기억들은 우리들의 기억 장치에 저장됩니다. 그런데 과거에 자신이 거부당했더 느낌을 다시 받게 되면 저장 되었던 느낌들이 되살아 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현재의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상황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다시 받지 않기 위해서 이성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반응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파괴적인 반응을 하게 됩니다. 특히 자라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입력된 메시지는 마음 깊숙이 새겨져서 어른이 된 후에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는 쓴 뿌가 됩니다.

어린 시절의 거부감은 대부분 부모와 형제로부터 옵니다.
이때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됩니다. 마치 오목 거울과 볼록거울에 비쳐진 사물을 보는 것처럼 뒤틀린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인데 그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위협으로 닥아옵니다.
거부당한 느낌이 스스로를 방어적으로 만들고 과잉 반응을 일으키는 요인이 무엇이까요? 인간의 내면에는 사람들의 사랑과 용납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하며 열심을 내는 이유도 사람들의 무시를 당하지 않고 용납과 인정을 갈구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안에서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을 보면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 아이들을 노엽게 만듭니까?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대표적인 거절의 메세지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비 현실적 기대가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이나 목표를 자녀를 통하여 이루어 대리 만족을 느끼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는 운동부터 시작해서모든 것에 일등이 되기를 바랍니다. 완벽주의입니다.
* 비교입니다. 자녀들 간에도 성격, 학업, 체중, 키, 친구 관계를 비교합니다. 다른 집 아이들과도 비교합니다. “누구는 일등만 한다더라.’ ‘너와 같이 피아노를 배우는 누구는 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했다더라.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나? 왜 매일 그모양 그 꼴이나?” 부모는 주위의 아이들과 비교해서 잘 못하는것을 문제로 삼습니다.
* 편애입니다.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비교만이 아니라 편애도 거절의 멧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아들을 특히 장남을 편애합니다. 그 결과 다른 자녀들들은 자연스럽게 거부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것은 낮은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자녀들중 특출한 아이들을 편애합니다. 성경에는 야곱과 에서의 예가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에서를 어머니는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그 결과 두 형제 사이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우리는 잘 압니다.
* 언어적 비 언어적 비하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거부하고 인젹적으로 무시하는 부모의 언행은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너는 싹수가 노랗다.” “이것도 모르냐, 이 돌대갸리야.” ‘너를 보면 꼭 ***를 닮았다”는 것은 언어적 비하입니다. 그러나 비 언어적 비하도 있습니다. 자녀들의 말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자녀를 바라보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말보다 더 강한 거부의 느낌을 받습니다. 또는 자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한숨을 푹푹 쉬는 행동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부모가 자녀에게 조건적인 사랑 또는 행위에 근거한 사랑을 보여 줬을 때에 자녀는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상처를 받습니다. 자녀가 공부, 음악, 운동에 기량을 발휘하면 사랑과 관심을 주지만, 그렇지 못해서 부모를 실망시켜 처벌을 받을 때, 자녀는 거부 당했다는 강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직접 혹은 간접으로 거부당한 경험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로서 인간은 무조건 적인 사랑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자녀 양육에 대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훈련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에 근거한 것일뿐만 아니라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 교양이라는 단어를 새 번역에서는 훈련으로 바꿨습니다. 영어로는 ‘Training’입니다. 이 말씀은 교정에 강조점을 둔 훈련을 말합니다.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의자에 앉힌다던지, 일을 하게 한다던지,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게 한다던지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훈계입니다. 영어로는 Instruction입니다. 이것은 훈련을 받아야 할 이전에 단계일 것입니다. 말로 바른 길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도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해야 합니다. 이 훈련과 훈계를 자기의 기분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4 가지 부모의 형태가 있습니다. 독재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자라나면 부모에게 도전하고 부모를 멀리 떠나고자 합니다. 무관심한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들은 상처가 크고 상담이 긴급하게 요청됩니다. 허용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줄까봐서, 삐둘어 질까봐서 두려워서 차마 훈계나 훈련을 못하는 부모입니다. 이런 경우에 자녀들은 안정감이 없고, 성취감이 없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권위 있는 부모가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부모가 아닙니다. 이런 부모는 자녀에게 대한 지극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과 훈계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자녀들은 높은 자아상과 안정과 지혜로움 그리고 긍정적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은 바로 부모가 권위있는 부모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신명기 6장 1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의 ‘자녀 교육 헌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명 ‘쉐마’ 즉 ‘들으라’입니다. 자녀들에게 내 말을 ‘들어라’가 아니라 부모들이 먼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을 주의해서 먼저 ‘들으라’’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그리고 성심껏 지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6장 6절의 말씀을 보면, 부모들이 먼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어떤 시청각 교육 방법을 통해서든지 바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즉 권위 있는 부모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분 또는 화를 낼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거룩한 의분을 나타내신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성전이 도적들의 소굴처럼 된 것을 보시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 당시 종교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덴에 가셨을 때 수 많은 우상이 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행 17:16). 예수님과 사도 바울에게는 의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정과 왜곡된 사실에 대한 정의로운 의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분은 화냄은 의분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 관계에 거부당함 때문에 오는 분노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인간은 거부감을 만날 때 깊이 새깁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거부감에 따르는 분노를 어떻게 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을 품게 되기 쉽습니다. 악의를 품고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계속 품으면 소송과 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빨리 반응하지 말고 주님앞으로 빨리 나가서 자신의 마음을 약함을 아뢰고 주님의 위로와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성경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내기를 더디하라.” 하셨습니다.

둘째로,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나는 성경대로 해 질때 까지는 품겠다는 말씀을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분을 오래 마음에 간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화해하거나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화가 난 채로 결코 잠자리에 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분노를 책임있게 다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을 마귀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분을 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서 그 상황을 이용하여 증오심을 격동시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멀리 떨어지게 하여 악을 행하는 일을 추깁니다. 어떻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까? 행동 이전에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 마음을 아뢰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고 선포하십시오. 시편을 보면 다윗왕은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성품과 행실이 하나님을 거룩하심을 닮아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는 우리 모두는 작던 크던간에 거부 되었던 쓰라린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쓰라린 경험을 준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심각한 것은, 우리가 입으로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의 죄책감, 거부당한 수치심 그리고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은채, 예수님이 약속하신 참 쉼을 누리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타인의 평가와 판단에 얽매여 주님이 약속하신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새 사람이 되었지만, 옛사람의 패턴에 따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가 된 우리들도 많은 거부감으로 인하여 때로는 수차심 때문에, 때로는 공격적인 태도로 반응함으로 인한 실수와 상처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으셨습니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거부함으로인하여 상대편에게 상처를 입힌 일은 없습니까? 그들에게 오늘 용서를 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혹시 자녀들 가운데 우리들의 거부감 때문에 무관심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은 없습니까? 오늘 자녀를 데리고 나가서 좋은 음식을 드시면서 진심으로 ‘SORRY’를 하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빌 길함이라는 학자는 거부감을 경험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피조물이 되어서 성경적인 자아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는 사랑과 관심은 물론, 의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자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옆에 있어주고 들어주는 것이 자기가 용납받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유명한 영국의 설교가 로이든 존스는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 데 기울이는 배려가 애완동물이나 화초를 기르는 만큼만 되더라도, 사정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짖지 마십시오. 해가 질때까지 품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빌미를 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거부받은 경험 때문에 죄를 짖지 마십시오. 마귀의 궤계에 걸러들지 마십시오. 이민 1세들인 우리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언어와 문화의 다름 때문에 많은 거부감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에게 거부 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주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지 나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렇게 믿으십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222 사역자를 세우기 위하여. 참고: 에베소서 4장 7-12절
221 모으는 자냐? 헤치는 자냐? 누가복음 11:14-26
220 주님의 부활, 우리의 변화 요한복음 20:19-23
219 하나님의 동역자들 고린도전서 3장 5-9절
218 역경에도, 순경에도 사무엘하 19:31-40
1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 참고: 창세기 3:14-24
2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참고: 로마서 8:29-30
3 새 해, 새 결심 참고: 여호수아 3:1-6
4 제일은 사랑 참고: 고린도 전서 13:13
5 무덤을 넘어서 참고: 에베소서 4:7-10
6 십자가의 도 참고: 고린도 전서 1:18-25
8 주지말 분노, 품지말 분노 참고: 에베소서 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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