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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시편 1:1-6
시계 바늘처럼 쉬임없이 분주하게 살다보니 음력 설도 잊고 지내시는 분들도 있을줄 압니다. 금년부터는 고국에서 구정을 민속의 날로 정해서 3일간의 공휴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구정 후 정월 대보름이 되면 한 해동안 개인, 가정, 사업에 액운이 없기를 소원하기 위해 호두나 잣등 깨 먹기도 합니다. 건강한 한해가 되기 위하여 하루에 밥을 9번 먹기도 하고 나뭇짐을 9번 지던 풍속이 있었습니다.

고국에서나 이곳 미국에서나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고 행복한 한해를 보내고 싶은 소원이 있읍니다. 이런 소원이 한복이나 수저나 베게에 ‘수복’이라는 글자로 쓰기도 합니다. 오늘 날 뜻있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한국의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강하다고들 합니다. 즉 신앙을 갖는 것이 복을 더 많이 받는 길 정도로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실천할 생활 헌장인 ‘산상보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복의 개념, 복된 삶의 스타일에 비추어 우리들의 행복관과 삶의 스타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시편 1편 말씀을 통해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에 대하여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시편 1편 기자가 말하는 복이란 무엇입니까?

복 있는 사람이 갖는 소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해서는 안될 일을 안하는 사람입니다. 성서는 행복한 사람은 다음 세 가지를 하지 않아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합니다.

쉽게 번역한 성경을 보면 “ 악한 자들의 꾀임이나 말을 듣지 않고”라고 했습니다. 생각이나 행동의 영역에서 선택하느 방향이 악에 대하여 무방비적 상태에 있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선의 편에서는 사람, 진리에 귀를 귀울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서에 행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꾀와 사람들의 꾀임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가롯 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였지만, 악의 꾀임에 빠지고 악인들과 손을 잡아 예수님을 팔아 넘긴 사람입니다. 그의 일생이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비참히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습니다.

둘째로, 행복한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죄인들으리 본 받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악인들이 사는 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사람이 사는 길에는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쉽게 가는 편한 길, 잘못 된 제도, 습관 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좁은 문은 죄의 짐을 지고는 못들어 갑니다. 다 벗어놓아야 들어갑니다. 좁은 길은 거추장 스러운 것들을 다 정리하고 간편하게 가야하는 길입니다. 넓은 길은 죄를 본 받는 길, 죄를 따라 가는 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으로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음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성서는 말하기를 “어떤 길이 사람이 보기에는 옳지만 필경에는 죽음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배우며 따르믄 생활이 행복한 길임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세상의 것들을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없는 부귀 영화늘 한갖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행복한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서는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아주 잘못된 각도에서 작품을 만들어 ‘마지막 유혹’이라는 파렴치한 작품도 나와 주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에게 나아가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악인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고 진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죄인의 길을 본 받니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순종하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한 삶의 자세에서 오는 것입니다. ‘복되다’는 말의 원래 뜻은 ‘똑바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성도들은 바른 삶을 삽니다. 바로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성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달이 행복하려면 차를 사라. 1년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그러나 영원히 행복하려면 하나님을 믿으라.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이상의 세 가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는 꼭 합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울법을 즐거워 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뜻은 ‘그 쪽을 향하여 굽힌다.’ ‘뜻을 두고 가까이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특히 율법(토라)은 하나님이 교훈, 훈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와 교훈을 향하여 열려있고 관심을 기울이는 삶의 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눈을 향하는 사람, 하나님께 대하여 허리를 굽히고 기도하는 사람,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몸을 굽히고 손을 굽혀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매일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기회를 갖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복있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묵상한다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입에 맴돈다’ ‘되씹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라는 뜻입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공부도 하고 깊이있게 묵상해서 알기를 원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적인 지식은 많았습니다. 입만 열면 성경의 말했어도 권위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한재 지식을 나열하는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희랍의 베레아에 가서 전도할 때 그들은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신앙 서적가운데 고전인 ‘그리스도를 본 받아’를 쓴 토마스 아켐피스는 “나는 성서의 구석 구석을 살피기위해 여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교회의 통계에 의하면, 주일에 교회에 와서야 성경을 한번 보는 사람이 26%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통계를 낸다면 어떻게 나올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쉬임 없이 닥아가는 사람입니다. 되새겨 보고 적용해서 순종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 진리를 삶에 밝혀가며 발견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살다 보면 악한자가 잘되고 선한 자가 망하는 것 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럴까요?

이제 우리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있는 사람이란 순결한 사람, 정직한 사람, 그 인생의 길을 흐트리지 않고 주의 교훈의 신실함을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면 악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성서에서 악이니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겨와 같이 안정감이 없이 요동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에 휩스려서 이리 저리 방향없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의 꾀를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이 진리에 의하여 안정되어 있지 않고 죽끓듯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악인이란 형무소를 다녀온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없이 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길, 의의 길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평범하게 말하는 악이나 죄의 개념보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성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란 행동의 결과만을 말하는 걱이 아닙니다. 진리를 떠나 이리 저리 방황하는 삶, 진리를 무시하는 삶을 말합니다. 성서에서 죄라는 말의 개념은 목표에 이르지 못하거나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행자지 하는 삶을 산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면 그 자체가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 의인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삶을 사는 삶의 길에는 거기에 따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그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이룬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악인의 길과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겨는 추수 후에 태워 버립니다. 바람에 날려 버립니다. 악인은 심기운 삶이 아닙니다. 벌나비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본분에서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 결과는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악인은 결과적으로 망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우리들이 악인을 부러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길게 보면 의인의 삶에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시련과 역경이 와도 푸르름을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만이 아니라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삶을 삽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을 사는 분은 안계십시까?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삶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며, 풍성한 열매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을 구주로 믿고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의로운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있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99 내가 감사함은 ( I am thankful…..) 디모데 전서 1:12-17
200 복있는 사람 시편 1:1-6
201 이삭을 도우신 하나님 창세기 26장 1-33절
202 전신갑주를 입으라! (2) 에베소서 6:16-17
203 전신 갑주를 입으라! (1) 에베소서 6장 14-15절
204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 에베소서 6:10-13
205 그리스도인의 직업 윤리 에베소서 6장 5-9절
206 바람직한 자녀 양육의 길 에베소서 6장 4절
207 새 생활. 새 법칙(6)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장 1-4절
208 기독교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길 본문: 에베소서 5:21-33
209 노아를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6:1-22
210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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