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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도우신 하나님
창세기 26장 1-33절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컽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선구자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조용한 분 같고, 무능한 분 깉기도 하고, 적극성이 결여된 분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으신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면 왜 이삭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을

* 흉년을 만난 이삭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 왜 이삭은 파기 힘든 우물을 계속 파야 했는가?
* 하나님은 힘든 세상에서 사는 이삭을 어떻게 도우셨는가?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들이 이민 생활을 하면서 당면하는 것은, 종종 이기기 힘든 외부적 충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직업을 잃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도 잘 안되고, 이곳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모든 것이 서툴기 그지 없습니다. 많은 변화와 몰아치는 물결 속에서 우리들의 무능을 뼈저리게 느끼신 적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교훈과 큰 힘을 주시기리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삭이 가나안 땅에서 당면한 문제가 무었이었습니까?

첫째로 이삭은 기근을 만났습니다.

이삭의 부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이민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나안으로 온 후에도 기근이 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흉년을 피하여 애급으로 내려갔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컽는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는 가나안 땅에 살면서 목축업을 했습니다. 많은 소와 양들을 가지 족장 이삭이 극심한 흉년을 피아혀 이동하다가 불레셋 땅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 사정이 더 나빠지면 애급으로 내려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흉년을 만나서 고민하는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급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 땅에 몸 붙여 살라.”고 지시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근을 피하여 애급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를 보살펴 주소 복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처럼 이삭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는데는 불신을 극복해야 하는 큰 믿음이 요청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할 때, 흔히 주위에서 일어나는 환경에 지배를 받습니다. 두려움이 옵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과 나를 향한 계획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개념만이 아닙니다. 신앙은 생활의 위기적 상황에서 선택할 때, 진리의 신실한 편의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로마서 12장 1,2절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악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큰 실패를 합니다. 그 실패는 아버지아브라함이 흉년을 피하여 애급에 갔을 때 한 실패와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죽지 않으려고 부인을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부인 리브가가 너무 예뻐서 그곳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 같아서 겁이났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위기가 오자 겁이 났고,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걱정을 넘기고자 하는 자신의 얕은 방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너와 함께 하겟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레셋 왕과 그곳 사람들을 볼 때 겁이 났습니다. 성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두려워 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시대상이 참으로 험악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렇게 살기로 주님 앞에서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오면, 이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앞세웁니다.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자신도 속이고 또 다른 사람도 속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고 핑계를 댑니다. 정직이 밥 먹여주냐? 적당히 속고 속이면서 사는것야! 라는 태도로 살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는 예” “아니요는 아니요”로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결국 이삭의 거짓말이 탄로가 남으로 인하여 크게 망신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비난거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삭처럼 사람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속이면, 그것이 발각될 때 자연히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생명을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권고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호의로 쫓겨나지 않고 그 땅에서 살던 이삭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둘째로, 이삭은 우물을 팠습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산간 지방이 아닌 불페셋 평원에 거하는 동안 이삭은 목축업만이 아니라 농사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수확이 많이 열렸고, 결국에는 재산이불어나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잘 되는 것을 보자 그 땅 주민들이 크게 시기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곳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가 그곳에 우물들을 판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으신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불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모조리 메꿔 버렸습니다. 그리고 불레셋 왕이 친히 이삭에게 말하기를 이 땅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암담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는 그곳보다 못한 골자기로 갔고, 거기서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찾았으나 흙으로 메꿔져 있었습니다. 그는 메꿔진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또 다른 우물들도 파니 콸콸 솟는 샘줄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걸고 그 우물을 빼았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또 빼았았습지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우물을 하나 더 팠습니다. 다행히 이 우물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

목축업을 하는 이삭에게 우물이 필요했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메워진 우물들 다시 팠습니다. 새 우물들도 팠습니다. 많은 오랜시간을 드려서 피땀나는 노력과 물질을 쓰면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윽고 샘물이 솟구쳐 올라오면 환성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뿐이었을 것입니다.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곳 사람들이 와서 빼았고 메꿔 버렸습니다.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날만 합니다. 그가 노력한 것들마다 다 절망으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 화가 납니다. 사나이답게 죽음을 각오하고 한번 싸워 볼 것이지 어떦게 그렇게 무능하게 당하기만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상상하건대, 아마도 그의 부인이나 종들도 그의 무능에 대하여 불평 불만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종으로 있었던 종들은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비록 부인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일에 있어서는 실패했을지라도, 이 일을 통하여 신앙적으로 각성하게 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계기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내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물 문제로 다투지 아니했습니다. 22절에서 이삭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그는 그가 팠던 모든 우물들을 통하여 지경이 넓혀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극심한 흉년 가운데서 이방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잠시 실패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대적들 가운데서 인내하였고, 형통케 하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삭이 당면했던 시련이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위기가 시련이 오히려 우리가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결국은 불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에게 와서 화친을 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반전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를 찾아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삭과 평화 조약을 맺으러 왔습니다. 초기의 실패를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잔치를 베풀며 아비멜렉과 화친한 후 이삭은 그 우물을 “맹세의 우물”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으로 살고, 세상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면서 살다보면 바보같고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삭이 결과적으로 그의 방해자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 되고 승리함을 봅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도 잠시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을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일에는 이삭의 힘으로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약속은 아침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불변하십니다. 본문 말씀가운데서 2-5,12,24절등 여러 곳에서 이삭을 찾아 오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으로 끝나지지 않으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나 불레셋 땅에서나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그가 우물을 팔때 샘을 솟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하신 자들에게 변함 없이 약속을 지키시며, 끝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이 기근을당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이방인에게 창피도 당하고 조상이 파놓은 우물은 물론, 자기가 판 우물들도 계속 빼앗기는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낳아 자라난 것이 복입니다. 아버지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연결 된 것이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위기를 만날 때에도 늘 동행하여 주심도 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도,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도록 하신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 때 늘 동행해 주시고, 실패할 때 일으켜 주심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앞으로도 우리가 때로는 힘들고 어려움을 겪을 때가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도 위기와 시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넉넉히 이기게 하시며 전화위복의 기회로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처럼 계속 생명의 우물을 파는 7전 8기하는 인내와 믿음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99 내가 감사함은 ( I am thankful…..) 디모데 전서 1:12-17
200 복있는 사람 시편 1:1-6
201 이삭을 도우신 하나님 창세기 26장 1-33절
202 전신갑주를 입으라! (2) 에베소서 6:16-17
203 전신 갑주를 입으라! (1) 에베소서 6장 14-15절
204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 에베소서 6:10-13
205 그리스도인의 직업 윤리 에베소서 6장 5-9절
206 바람직한 자녀 양육의 길 에베소서 6장 4절
207 새 생활. 새 법칙(6)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장 1-4절
208 기독교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길 본문: 에베소서 5:21-33
209 노아를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6:1-22
210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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