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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직업 윤리
에베소서 6장 5-9절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실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의 절반이 노예신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노동력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흥황을 누릴 수 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로 또는 집안의 잡이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전쟁에 패해서 승전국에 잡혀 왔기는 했지만, 교사나 의사 또는 관리로 종사했던 유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기 상전들 보다 교양면에서나 학식, 기술면에서 월등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이 온 가장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시대에 노예의 대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있습니다. 노예는 소유주의 ‘영혼있는 소유물’이었습니다. 노예는 하나의 ‘살아있는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들을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들의 손이나 발을 자르기도 했습니다. 이나 눈을 뽑히는 노예도 있었고 맹수의 밥으로, 사형으를 받음으로 일생을 끝내는 비참한 노예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종식된지는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종 차멸이나 인종편견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고국에서 양반과 상인의 신분은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자와 피 지배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기업가와 종업원의 문제는 없습니까?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은 약 2천여년 전의 한 사회 현상에 대한 교훈만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아래서 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직장생활을 합니다. 자연히 상하 관계가 형성됩니다. 기업인과 종업원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대부분 이민자들이 고국과는 다른 입장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직장을 잡아도 고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말단 생산 단순 노동직에 들어가서 일하면서 고민하는 분도 많습니다.

이미 봉독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에베소서 6장 5-9절을 묵상하는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학생의 신분으로 계신 분들들도 머지않아 기업을 하는 사람으로 또는 직장인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 가실 때 오늘 본문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윤리와 가치 기준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 당시의 종들에게 주신 권면들을 살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전적으로 파괴하지 않고 동조한 그릇된 종교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분명히 성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노동자 계급이나 노예들의 무장 봉기를 획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혁명, 신분의 차이를 메꾸는 하나님의 은총한안에서의 서로 섬김을 통한 자연스러운 해결을 원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서신을 쓰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들에 대한 호의적인 제도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자유인으로 해방시켜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BC 81년부터 BC 49년 사이에 50만명에 달하는 로마의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주인들과의 좋은 관계는 주인으로부터 빨리 자유를 허락받는 기회를 갖을 수 있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주후 50년경 클라디오 황제는 주인에게 병들어 버림 받았던 종이 회복되면 자유를 주라고 공표했습니다. 그리고 AD 90년경 도미티안 황제는 노예의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을 금지했고, 2세기 초 하드리안 황제는 노예들을 음란의 목적이나 칼싸움을 목적으로 매매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이 기독교화 한 후에도 노예 제도를 유지한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유명한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은 “노예 제도는 인간 원죄의 소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도대체 그런 치욕을 받아야 된다는 것은 모든 자연적 질서에 전적으로 어긋나닌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대하여 역사에 귀한 일을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18세기의 영국의 정치가 윌버포트나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눈에 보이는 노예 제도가 거의 없어진 것 같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을 이익의 수단으로 보는 사조입니다. 노사 분규는 왜 일어납니까? 각자가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음은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른 각자가 자기편의 권리가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을 서로 먼저하라는 것입니다. 종업원이나 기업인이 서로 상대편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며 이익을 주려고 한다면 그 해결은 자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당시의 종들에게 그들이 주인들에게 감당해야 할 책임을 바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종들에게 주신 권면은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께 복종하듯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 5장 21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듯이 그 가정의 한 식구처럼 구성원이 된 종들도 마땅히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태도로 순종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그리스도의 종답게, 주님을 섬기는듯한 기쁨으로 하라고 5,6,7절에서 권면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두렵고 떨림’ (Respect and fear)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말을 주인에게 아첨하거나 주인을 우상숭배 하듯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진정으로 주인의 권위와 그의 뜻을 이루려는 경건하리만큼 준비된 마음,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즉 위선이나 다른 의도를 숨기지 말고 순수하고 성실하게 성심껏 섬기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쁘게, 풍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헬라말의 원뜻 가운데는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을 가지고’하라는 말입니다. 한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눈가림만으로 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상전이 볼 때만 잘하고 비위나 맞춰서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일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5-8절을 보십시오. 종들에게 주신 각 절의 권면마다 우리 ‘주님’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들은 상전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새 번역으로 보면”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종이든 종이 아니든 각기 주님께로부커 그만한 상급을 받을 것을 알아두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종으로써, 주인을 존경하고 성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면 주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아울러서 종에게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종이 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님는 바로 평가하십니다. 그런데 종들 가운데는 불신자인 종을 상전으로 모신 종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주인에게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18절을 보면 “하인으로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인에게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뿐만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주님을 대하듯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상전들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상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2.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라.”고하셨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의말씀입니까?

첫째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려면, 그들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쁨으로 일하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종들이 그들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스스로도 종들을 대할 때 주님께 하듯, 순수한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공갈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즉 종들을 협박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권세와 지위를 이용해서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갈 협박은 권력자, 가진자가 약자, 없는 자에게 휘두르는 무기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주인들은 공갈 협박에 기초한 종들과의 인간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 1절에서는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8절 말씀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하나님의 판결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종들에게나 주인에게나 주인 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며 또 그분은 “모든사람을 차별없이 대해 주신다는 걱것을 알아야 합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전지 전능하십니다. 주인들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는 “종이나 자유자나 구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종이나, 그리스도인 주인이나 기업인이나 종업원이나 사실 다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다 한 아버지 앞에서 만날 날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유를 얻은 종이 기업을 해서 자기 주인보다 더 성공한 예도 있었다고합니다. 어떤 종업원이 어느날 자립해서 옛 주인보다 더 큰 사업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묵상한 이상 다음 몇 가지 결심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인간 관계에서 상호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겠다.
- 나는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겠다.
- 나는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일아여 상대편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해방 신학이나 민중 신학을 살펴보면, 노동자편의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느낌이듭니다.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장 봉기도 불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말씀하시기를 제도의 문제는 서로 사랑함으로 그 악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힘으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사회의 악을 폐지하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종업원입니까? 어떤 종업원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기업인입니까? 어떤 기업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종업원이든지, 기업인이든지 하늘의 상전이 계신다는 것을!

Number Title Reference
199 내가 감사함은 ( I am thankful…..) 디모데 전서 1:12-17
200 복있는 사람 시편 1:1-6
201 이삭을 도우신 하나님 창세기 26장 1-33절
202 전신갑주를 입으라! (2) 에베소서 6:16-17
203 전신 갑주를 입으라! (1) 에베소서 6장 14-15절
204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 에베소서 6:10-13
205 그리스도인의 직업 윤리 에베소서 6장 5-9절
206 바람직한 자녀 양육의 길 에베소서 6장 4절
207 새 생활. 새 법칙(6)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장 1-4절
208 기독교 가정의 남편과 아내의 길 본문: 에베소서 5:21-33
209 노아를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6:1-22
210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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