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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에베소서 3장 17-21 |
저게 딸아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서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내게 자주 전화를 하는데, 전화를 끊을 때마다 “I love you. Dad!"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연세가 드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국에서 자라란 우리들은 잘 안나오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응. 고맙다.“말하고고 끊으려고 하면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묻습니다. ”사랑하지“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아빠도 ”I love you too.라고 말씀 하셔야지요.“라고 훈계를 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해왔습니다. 이제는 딸 에게 핀잔을 받느니 아예 하자하고는, 전화를 끊을 때 “I love you."를 곧잘 합니다. 월터 트로비치라는 분이 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합시다.“ 라는 부부들을 위한 책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의지로 결단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입으로 시인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잘 아시는 요한 복음 3장 16절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부터 시작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과“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하나님을 사랑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니라.”(마태 22:37-40)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될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게 됩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누리게 해 줍니다. 용기를 갖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있는 사람은 눈이 반짝입니다. 태도가 아름답고 부드럽습니다. 고귀한 인격을 형성해 나갑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진리라는 기준과 사랑이라는 삶의 두 바퀴의 균형을 잘 맞추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읽어주신 말씀가운데서 18, 19절 가운데서 일부분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기도는 기도를 함으로써 배우고, 사랑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배웁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간 7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수고한 제자들에게 만선이 되도록 고기를 잡도록 하신 후에 제자들을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로 대접을 하셨습니다. 왜 제자로서 기도는 하지 않고 고기 잡으러 나갔느냐는 꾸중 이전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사랑은 육체적, 감정적, 영적 필요를 보는 통찰력과 그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그후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서 이렇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 승천하실 주님이 베드로에게 확인하고 싶으신 것은 “사랑”이셨습니다. 왜 사랑이 제자의 사역에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요?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기 때문입니다(고전 13:1). 그의 사역도 헛된 것입니다.
주님은 물론 사랑하는 마음, 궁휼히 여기는 자들의 복을 산상 보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부모와 처자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형제와 부모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군으로서 사랑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장 7, 8절에서 그 시대에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 13:34,35)고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한없이 넓게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 좁은 이성으로는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시면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넓이는 이 우주라도 그 넓이가 좁습니다. 주님은 악인과 선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양의 동과 서를 분간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남과 여의 분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들의 성장 경험가운데 우리 대부분은 불완전한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한이 없이 크다고 하는 스승이나 부모님의 사랑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낳으신 순서에 따른 배려가 다르기도 하고, 공부 잘하고 못하는 차이로 인하여 부당한 인격적 대우를 받고 큰 것이 우리들의 아픈 경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가 사랑 받을 만한 인간이라서 죽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찌꺼기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한없이 썩여들인 죄인들의 괴수와 같은 우리들을 살리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 스데반을 죽이고 다마스커스로 피난간 성도들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가는 자기를 품어주신 그 사랑에 감사해서 일생을 주님께 드리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엄하셨는지 아버지 말만해도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후에는 주님의 무한한 넓이의 사랑을 전하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34) 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주님을 모시고 삽니다. 주님의 넓으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복을 누리면서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점차 사랑의 넓이를 넓혀 가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내 가정, 내 사람만이 아닌, 이웃과 성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는데도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고 언제나 ‘나’라는 범주 안에 머물면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기독교가 되어서는 되겠습니까?
기억하십시다. 사랑은 넓이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위에 사시면서 보여주신 바와 같이 말입니다.
넓은 사랑을 가지려면,
첫째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선입관념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고정 관념도 탈피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흑인이나, 멕시코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이나 생각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분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고귀한 분들입니다. 외모나, 학식이나, 빈부를 가지고 베풀 사랑의 폭을 결정해도 안되겠습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부터입니다. 주님은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까지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사랑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대가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에라야 그 베풂이 고귀한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배곺은 사람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셔서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도 채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갚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상호간에도 나의 유익 때문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서로 사랑함으로서 넓어집니다.
사랑은 대상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가를 물으셨습니다. 한이 없으신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들의 사랑을 요구에 대한 응답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들의 사랑을 기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살다가는 인생을 사랑하면서 살기도 사실 짧습니다. 서로 미워하면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합니다.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의 향기를 가슴 가슴마다 심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알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립된 그리스도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일면을 깨닫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그의 제한된 경험 때문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은 경험적으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씀은 지식적인 이해를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이 안다는 말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요한 1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길,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람들 만을 사랑하면, 세상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성서는 말합니다. “원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12:20).
이 시간, 용서 못할 사람이라고 낙인찍은 원한에 갖혀 계신 분은 안게십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나를 위하여 절규하시던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고, 나의 원수 같은 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 하셨습니다. 나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그 일이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고통처럼 아픈 것입니다. 이런 아픔이 없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일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은 나의 좁은 마음의 창을 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이해 득실에 찬 사랑에서 자유 해 지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다. 기도는 주님을 앙모하는 우리들의 겸허한 마음입니다. 기도는 상대편을 변화시키기 전에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생각의 전환, 행동의 전환, 말의 전환을 시켜 주시는 것을 아픈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 보신 분들은 다 경험하신 줄 압니다. 찬송가 482장 3절 하반절을 보면 “참 마음으로 뉘우쳐 다 숨김없이 아뢰면 주 나를 위해 복 빌어 새 은혜 부어 주시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성도님이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고 하시면서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당한 마음의 서운함과 아픔을 주님께 숨김없이 기도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평화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의 사랑의 넓이는 얼마나 될까요? 혹시 나라는 담을 넘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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