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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의 높이를 알자.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절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 세모일까. 아니면 네모일까? 동그리미일까? 세가지 도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원만한 동그라미를 선호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랑은 그 모양이 하도 넓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때로는 높기도 하고, 깊기도 해서 그 형상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장 7, 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다.“고

우리들은 지난 2주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읽으신 19절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주님의 사랑의 높이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로 깨달아 알아야 우리들의 신앙이“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해도 풍요롭고 기쁘게 하는 분들이 있고 형식적이고 힘들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왕 주님을 믿고 살 바에야 즐겁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시려면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그 사랑을 경험하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참 기쁨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리라.“고 (요 7:38)하셨습니다.
이 험한 세상, 목마른 세상, 거친 세상에서 절망과 좌절과 낙담가운데 사는 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 당시에 우상숭배로 찌든 대 도시, 성적 , 도덕적으로 부패한 에베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교회는 사랑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아세아에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2장 4,5절을 찾아보십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 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보존하고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죄지은 것만을 회개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들로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회개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상실한 것을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사랑의 실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얼마나 높은 것일까요?

1. 주님은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이나 여성들을 귀하게 여기 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오면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제자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안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는 남녀 노소 빈부 귀천 없이 누구나 귀중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 천대를 받던 세리, 창기들까지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사람들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도 하셨습니다.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 가정이 구원의 기쁨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천대받고 인간 쓰레기 같이 취급하던 사람들의 관념을 깨시고 그들의 삶을 높이 끌어올리셔서 하나님이 그들도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죽으심을 인하여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비행기나 로켓을 타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인하여 용서받은 백성들이 가는 높은 영적 나라입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을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높이 끌어올리신 분이 예수님이 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도 높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삶의 가치와 내용을 높이면서 삽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을 벗어버리고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갑니다.

2)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 고 하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예로 들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조금 내려가서 9절을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역설적인 것 같지만, 높은 사랑의 경지에 이른 분일 수록 자신을 낮추는 것이 특색입니다. 모든 성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의 생활의 특징은 겸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모세만큼 유대인들에게 높임을 받는 분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분입니다. 10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받은 분입니다. 그의 얼굴에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인한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볼 수 없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울 만치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범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백성들을 진멸 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 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모세의 사랑이 얼마나 우리들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희생적이 사랑을 닮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신을 비워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을 볼 때마다 그 크고 높은 사랑에 감격합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영적 높은 경지에 이르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낮추어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높여주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은 비죤을 주시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비죤은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원하시는 가를 분명하게 깨닫고 마음에 선명하게 그리어 전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그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삶의 정황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부르시고 ‘베드로‘하고 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12제자를 부르시고 주님의 제자요 하나님 나라를 넓혀갈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비죤을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사랑은 야릇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어떤 황홀한 감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대 계명’과 ‘대 사명‘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비죤이 되기를 주님은 바라셨습니다.
순종을 하게 되면 자연히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역사 하셔서 감동과 기쁨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지난 주일을 살아왔는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는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일생을 통하여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벌써 10월입니다. 허송 세월로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주신 비죤을 따라가는 것이 주님의 높으신 사랑에 반응하는 길입니다.

우리들이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해 할 때 좋은 교제, 인간 관계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편이 삶의 내용과 질을 높여주는 일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상대편이 절망하고 괴로워 좌절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가 있음을 깨닫게 해서 눈을 높이 들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상대편의 유익과 발전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모습 속에서 그가 얼마나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상대편에게 비죤을 주고 앞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높은 사랑을 배운 성도의 삶이 아니겠습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움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 반대말을 무관심입니다. 이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자기에 대한 무관심, 배우자에 대한 무관심, 자녀에 대한 무관심, 가정에 대한 무관심, 교회에 대한 무관심, 사회와 국가에 대한 무관심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무의미한 인생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주님의 높은 사랑을 배우면서 사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39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2) 참고: 빌립보서 1:1-2
140 바람직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 참고: 빌립보서 1:3-5.
141 값진 사랑을 위하여. 참고: 빌립보서 1:8-9
142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자. 참고: 에베소서 3장 17-21
143 더 높은 삶의 표준을 위하여. 참고: 빌립보서 1:10-11
144 사랑의 길이.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
145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참고: 빌립보서 1:12-14
146 주님의 사랑의 높이를 알자.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절
147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2). 참고: 빌립보서 1:12-14
148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참고: 빌립보서 1:15-18
149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 예수님.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
150 구원의 길. 참고: 빌립보서 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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