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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빌립보서 1:12-14 |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책에서 “결혼하라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심사 숙고해서 선택한다고 해도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빌 크린턴 대통령은 최근 라디오 방송에서 “내가 1995년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었을 것“이라고 그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서 살고, 순수한 삶을 살아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지 말며, 다른 사람에 의하여 넘어지는 허물 많은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과, 자신을 주님의 의지에 복종시킴으로서 주님을 만날 때까지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묵상했습니다. .
오늘은 사도 바울 선생님의 과거와 현재에 당하고 있는 고난을 어떤 입장에서 보고 극복하고 계신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어떤 입장에서 이해하는 가는 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생을 주님이 주신 비죤을 중심으로 해서 보았습니다.
그가 로마의 감옥에 매인바 되어 지난날들을 돌이켜 볼 때 고난과 아픔의 많은 날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1:23이하를 보면 매맞고, 헐벗고, 추워서 떨고, 굶주렸던 힘들었던 사역의 길이 적혀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이방인 교회가 모금한 주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고, 유월절을 지내다가 성전에서 잡혀 맞아 죽게 될 지경에 로마 군인들의 진압에 의하여 위기를 면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빌립보서를 쓰는 현재까지 매임을 당한 옥중 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날의 옥중 생활도 주님이 주신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신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이해했습니다.
1.복음의 진보에 감옥 생활이 유익했다고 말했습니다(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내부적인 영역을 외부 적인 영역에 의하여 축소되기보다는, 넓혀가는 방법의 삶을 살았습니다. 즉 환경을 보는 시각을 달리했습니다. 비전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사도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마지막 부분과 22장을 보면,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서 자신을 죽이려고 아수성 치는 군중들을 진정 시킨 후에 그의 유명한 간증인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호소력 있게 전했습니다. 물론 글의 간증에 대한 군중의 반응은 냉소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그를 반대하는 군중들에게도 복음 전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유대 총독과 왕에게도 복음 증거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이 옥에 갖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려 알았습니다. 유대에서 감옥에 있을 때 그는 옥에 갖혀 있었기 때문에 두 총독을 만나서 전도할 수 있었고, 아그립바 왕과 고관대작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정치가들은 그의 무죄함을 알고도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하여 그를 계속 감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상소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그가 로마를 향하여 항해를 할 때 유라굴라 라는 큰 태풍을 만나서 모든 승객들이 14일 동안 먹지를 못하고 표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으니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24,25)고 안심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그 배에 탔던 모든 승객이 멜리데 섬에 상륙했습니다. 그후에 그 섬에서 제일 높은 보블리오의 부친의 병을 고쳐 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갖히기 까지 어려웠던 과거를 회상해 보면서 그것이 결코 무가치한 일들이 아니라 매우 유익했던 일이었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한은 어떤 환경이든지, 얼마나 어렵든지 최대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빌3:8). 살든지 죽든지 그를 통해서 주님이 나타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롬 8:28). 사도 바울 선생님에게 있어서 주님을 더욱 알고 주님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삶의 최대의 의미였기 때문에 고난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어려웠던 시절이 있을 것입니다. 건강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학업의 문제 등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일들을 신앙적인 차원의 렌즈로 점검해 보십시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와 눈물과 고생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승화하지 못한 채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주안에서 과거의 경험을 하나님이 쓰실 감동의 영역에 예치하시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복음의 진보가 된 사도 바울의 로마 감옥 생활(13,14).
-시위대 안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위대란 로마 황제의 궁전을 지키는 군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군인들 중에서도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진급과 대우 면에서 월등했습니다. 9천명 가량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황제에게 상소한 죄인들을 감시하는 위병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밤낮으로 쇠고랑을 차고 시위병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시위병들은 6시간마다 교대를 했습니다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가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면회자들이 오면 시위병들도 함께 참석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도할 때 들었을 것입니다.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손이 묶여 있으므로 직접 쓰지 못하고 대필을 시킬 때에 그의 말을 들었고 문장을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식사하는 일,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볼 수 있었습니다. 시위병들은 사도 바울의 온유함과 인내성을 잘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항한 사도 바울의 용기와 충성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당시 로마의 엘리트들에게 6시간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아무리 수고한다고 해도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확실하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옥중 생활은 그의 복음 사역의 황금기를 마련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 바을이 힘쓴 일은 매인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13).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시위대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표준성경 번역에서는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밖의 모든 사람이란 시위 병들의 가족들, 로마의 관리들, 그들에게서 사도 바울의 위대한 복음 정신과 삶에 대하여 들은 로마의 궁전 안과 밖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보지 못한 고상한 죄수에 대한 소문과 그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온 로마 성에 돌았을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된 사람의 영향력의 파장은 넓게, 넓게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모든 것이 우연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경륜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사회 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사, 언, 행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비치는 가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러 온 성도들의 사랑과 희생의 모습 속에서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다른 많은 형제 자매 가운데서도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14 상).
사도 바울의 로마 옥중 생활은 시위대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만 충격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살면서 주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에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진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시위대에게 영향을 줄뿐만이 아니라, 그 소문이 로마에 번져나가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모범 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용기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즐겨 받을 수 있는 성숙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따라 살면 손해 본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한다면 더 바보처럼 보인다는 피해 의식입니다. 기억하실 것은 우리들이 주님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 후서 3:12를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받으셨습니까?
주위 사람들이 우리들의 사, 언, 행을 볼 때 우리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릅니까? 우리들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까?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시며,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전하십니까?
요한 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 여러분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시각을 나로부터 주님으로 돌리십시오. 그리하면 고난과 눈물이 오히려 값진 보석과 같아질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의 고난 문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는 계기요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는 성숙한 상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생에 한번도 서보지 못했던 불우한 시인 송 명희 자매는 그의 아픈 삶을 이렇게 승화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남이 못 본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저와 여러분이 어떤 고난이라도 이길 수 있는 의미를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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