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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깊이 사랑하신 예수님.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
인간 존재를 자세히 살펴보면, 도덕적인 면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악을 행했을 때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계속 잘 못 사용해서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영원에 대한 동경도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허무, 좌절, 무의미함에서 괴로워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목표를 상실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들이 있습니다.

한 밤에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선생이요 관원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피상적인 말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인줄 아나이다.”라고 주님을 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그의 중심에 있어야 것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외향적으로는 누구나 보아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요 성공한 종교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의 공허한 내면의 필요를 보셨습니다. 그의 삶에 의미와 희망의 횃불을 밝혀줄 사랑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실 때 피상적으로, 건성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의 내면 깊숙이 덮인 어두움을 밝히는 사랑, 문화와 관습, 죄와 거짓으로 겹겹이 쓴 껍질을 벗겨주시는 사랑을 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신앙의 껍질을 쓴 위선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이신 주님과의 계속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과정을 가는 겸허한 순례자가 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우리들의 죄책감을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죄지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의 치료책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도덕적, 영적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라는 찌꺼기가 마음에 가라앉습니다. 나중에는 독소가 되어 그를 괴롭힙니다.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분은 율법의 으로는 완전한 자라고 말할 정도로 바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죄책감을 이길 수 없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밥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고 절규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절규하는 고통을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은 고뇌하는 우리의 깊은 아픔과 상처를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1) 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38편 3, 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성도 여러분! 혹시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통받은 분은 않게십니까?
주님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절규하는 고통을 들으시고 우리들을 사랑으로 치유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고통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주님께 치유해 주시기를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인간은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으려는 마음의 방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그 마음의 방에는 주님이라도 드릴 수 없다는 단호한 마음을 가진 채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이 없지 않아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명예일 수도 있겠지요. 어떤 욕심이나 포부일 수소 있습니다. 아니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비밀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139편 3절을 보십시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있거나 주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주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마음에 숨긴 것을 보시고 해결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므로 언젠가는 들어 날 마음의 숨은 죄를 그냥 가지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 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서로 짜고 사도들을 속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비밀을 알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패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 139:7,8)

물도 그냥 가두어 두면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문도 계속 닫아 두고 있으면, 냄새가 납니다. 썩습니다. 주님이 비춰 주시는 치료의 광선을 비추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주님이라도 이 부분만큼은 손대실 수 없다고 못박아 둔 방은 없습니까? 나의 습관 중에, 나의 인생의 목표 중에, 나의 마음의 상처를 비밀의 방에 꼭꼭 잠궈둔 것은 없습니까? 그런 상태로 백날 신앙 생활을 한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을까요? 결국은 회칠한 무덤 같이 겉에서 보면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은 썩은 시체가 있어서 독한 냄새를 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의 치료의 광선을 받아야 할까요? 먼저는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풍요로운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교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마음의 문이 닫혀있으면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줍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공격적인 사람이 됩니다. 방어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 없는 눈치보는 사람이됩닌다. 도둑놈이 제 발이 저리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의 마음에 깊이 숨겨둔 물질에 대한 욕심을 아셨습니다. 자신을 팔려는 계획도 아셨습니다. 그를 누차 권면 했어도 그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채 주님을 뒤로하고 어두움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제자로부터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일생의 말년이 어떻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목매어 자살 했는 데 그 줄이 끊어져서 매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다녔어도 그의 마음 문은 굳게 잠궈 두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나의 내면 깊이 있는 문들을 열고 주님의 사랑의 빛을 비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이 싹트고 변화가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표현하지 못하는 소원들을 아시고 성취시켜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일 수도 있겠지요. 자녀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잘 성장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 깊숙이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그랬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그랬습니다. 여리고 성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이삭 같은 믿음의 조상 가운데 한 분은 가정에 자녀가 없자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을 구하여 자녀를 얻었습니다. 성서는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소원을 주께 아뢰라고. 그러나 주안에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 지 알지 못하는 때에라도 성령님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고(롬 8:26) 하셨습니다.

다윗은 “내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는 나에게 응답해 주셨고 내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시 138:3). 좀 더 내려가서 8절을 보면, “주께서 내게 세우신 목적을 이루어 주시니, 주님, 주의 인자는 영원합니다.”라고 찬송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선한 목적을 이뤄 주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닮아 살아가려는 마음의 소원, 잃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소원, 인생을 보람되게 살려는 소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아시고 이루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신앙 생활에는 주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거룩한 열망, 소원이 마음에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열매 맺는 기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은 내 마음의 주님께 대한 소원이 만족하게 이루어지는 감동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에 없으시다면 마음속 깊은 곳에 거룩한 소망을 갖도록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로몬 왕은 지혜를 열망했습니다. 그 결과 지혜만이 아니라 부귀와 명예도 가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월이 빠릅니다. 허송 세월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가을에, 죄책감으로 고민하는 분은 안게십니까?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의 괴로움을 숨기지 말고 낱낱 아뢰십시오. 주님의 용서와 평안을 얻으실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은 곳은 없습니까? 너무나 상처가 깊어서 드러내지 못하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아픔을 주님은 아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믿고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주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을 위한 숭고한 열망은 무엇입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계속 구하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두리는 이에게 열리 것이니라.”(마 7:8)

주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영혼의 깊은 곳의 절규와 아품을 들으시며, 치유하시고 , 그리고 간절한 영혼의 소망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믿으십니까?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39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2) 참고: 빌립보서 1:1-2
140 바람직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 참고: 빌립보서 1:3-5.
141 값진 사랑을 위하여. 참고: 빌립보서 1:8-9
142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자. 참고: 에베소서 3장 17-21
143 더 높은 삶의 표준을 위하여. 참고: 빌립보서 1:10-11
144 사랑의 길이.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
145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참고: 빌립보서 1:12-14
146 주님의 사랑의 높이를 알자.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절
147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2). 참고: 빌립보서 1:12-14
148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참고: 빌립보서 1:15-18
149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 예수님. 참고: 에베소서 3장 19-21
150 구원의 길. 참고: 빌립보서 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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