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참고: 마태복음 23장 37-39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의 약 1/3이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아침 읽으신 본문은 마지막 주간 중에서 화요일 성전에서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걸어온 논쟁들에 대하여 명확한 답변으로 진리를 전하신 후에 그곳에 모여있던 무리와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다음 한 주간을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 주간을 맞게 됩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자녀들이라면 마땅히 주님이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던 마지막 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주간을 보람있게 보내는 것일까요? 마지막 주간에 주님이 주신 교훈의 말씀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 나가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주님의 주위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주신 교훈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1. 저희의 행하는 바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23:1-12).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1613가지의 실생활에 대한 법들을 만들었습니다. 거의 다 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 중에 248개는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그런 것들을 더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형식적인 법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의미를 망각한 채 자기들이 만든 법칙들에 얽매여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 채 신앙적인 열심, 외부를 꾸미는 형식을 꾸미는 일에 흠이 없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성은 소문이 나서 종교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많이 공부해서 지식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자칭 자기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성공한 사람이요,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산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보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은 잘했습니다. 들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었습니다. 말은 행함으로 증명될 때라야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자기는 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우고는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서 오는 기쁨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일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종교적 행위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종교적 방법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했습니다.” 경문이나 옷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장식물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자 했습니다. 경문은 조그만 가죽 상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 율법에 귀중한 4가지를(출 13:1-10, 11-16, 신 6:4-9, 11:18)절을 기록해서 보관하고 머리에 매었습니다. 또는 심장이 가장 가까운 왼팔에 매고 다녔습니다. 경문도 율법의 중요한 성경구절을 써서 옷에 걸쳤습니다. 이 규격을 그 당시의 스승들에 의해서 크기가 정해져 있었으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 폭을 넓혀서 그들의 신앙심을 과시했습니다. 잔치나 회당에 가면 맨 윗자리가 자기 것이 되어야 했으며, 스승이니 지도자니 하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3절)고 하셨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요약하면,
1) 진리를 말하는 자만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자가 되라.
2) 그리스도만을 지도자로 모시고 살아라.
3) 높아지려고 하기보다는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 니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가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인격을 주님이 주신 교훈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 안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낮아지신 주님을 배우는 생활, 나를 주님 앞에 서 낮추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주요, 지도자이심을 확정하는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화를 당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13-36).

마태복음 23장 13-36절을 보면, 7가지의 화를 당할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번과 두 번째의 화는(13-15) 구원의 길을 막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의 것은(16-24) 풍성한 삶을 막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것은(25-28) 외식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의 앞에서 나온 외식의 절정으로 인하여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온 “화”라는 말을 그리스말로는 “우아이”(OUAI)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계약 종결의 통보를 받는다.” “공공연한 질책을 받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구원의 길을 막았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경책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침으로 그들이 천국 문에 이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편 적극적으로 전도를 하지만 그들과 똑같은 형식적 종교인들을 만들어서 지옥에 빠뜨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15).

신앙생활은 오래 해서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지만, 기도는 그럴듯하게 하지만 천국 문을 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외식하는 자들이 받을 ‘화’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형식적인 종교인들은 풍성한 생활을 막는 일을 했습니다(16-24). 그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가르침으로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즉 그들은 성전보다는 성전의 금을 더 중요시하여 맹세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금과 예물을 드리는 이차적인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헌금 내는 것이 신앙의 기준인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헌금은 감사와 사랑의 헌신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바친 금에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수님은 그들을 영적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험해서 풍성한 삶을 누리고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많이 드리면 복 받는 다는 말입니다. 그의 개인적 생활이나, 이웃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복채 드리고 복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23절에는 십일조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들은 집에서 재배하는 양념으로 사용할 식물의 작은 양에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중심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들의 서원이나 헌금이 불필요하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외향적이요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을 들어오실 때 헌금함에 넣고 들어오십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을 모아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식적으로 하시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도하고 준비하셔서 바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형식적인 헌금 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롬 12:1,2). 나의 전 존재를 원하십니다. 생활이 다 주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십일조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약 성도들에게 주셨던 율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 성경을 연구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는 약 23 1/4%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1/10 조 이외에도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일년에 세 번 예배하러 갈 때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추수할 때 밭의 한 쪽을 남겨두고, 과일나무에서 다 따지 않았습니다. 종들을 해방시켜주어야 했습니다. 매 50년마다 산 땅을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1/10을 내니 나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의와 인과 신”즉 생활도 드려야 합니다.

25-28절을 보면, 그 당시 지도자들의 문제는 진정한 회개가 없는 외형적인 신앙이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진정한 회개가 없이 겉만 꾸미는 신앙 생활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27). 유대나라의 묘는 굴을 파서 만들기도 했고,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봉분을 만들어서 그 안에 시체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 봉분을 1년에 한 번씩 회칠을 했습니다. 그래서 겉에서 보면 희고 깨끗하고 아름다웠지만 속은 썩는 시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8) 고 한탄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한 결과 하나님의 일군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34).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 고 경고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일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리는 죄’를 지음으로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천국 생활을 한다고 자부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지옥의 문턱에서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잘못하면,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 천국 문을 막는 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누려야 할 풍요로운 삶을 해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날마다 주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경건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질책을 면하지 못할 것을 기억하십시오. 혹시 이런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만족하신 분이 계십니까? 회개하십시오. 마음을 주님께 토해내십시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십시오.

3.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마음 아파 하셨습니까?

그들은 주님까지도 거부했습니다(37).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들에게 파송한 일군들을 돌로 처서 죽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증거해 주시고 하나님의 품안으로 모으고자 했지만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거부한 결과는 어떻게될 것입니까?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함락되어서 돌 위에 돌이 남지 않도록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유대의 역사는 처참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그 날까지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요 심판입니다. 주님의 얼굴의 영광이 비추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런 가정이 된다는 것, 그런 사회와 민족과 국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않고 이 험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일까요?

왜 그들이 이런 종말적인 심판의 자리에 설 때까지는 다시 주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는 삶은 없었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오간 데 없고 겉이나 그럴듯하게 외부만 꾸민 신앙생활, 회개하지 않고 악을 쌓는 생활, 존경이나 받으려하고 성서적인 지식이나 자랑해서 상좌나 차지하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던 주님이 우리들의 이름을 오늘 간절히 부르시면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다음 세 가지만 스스로 물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가?
나는 화를 당할 죄를 그냥 묻어둔 채로 밖만 꾸미는 자는 아닌가?
나는 주님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가? 잘못을 발견하면 즉시 통회
자복 하는가?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황폐하여 버린 바 된다”는 경고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15 사도 바울의 감사와 기도(5) 참고: 에베소서 1장 18-23절
116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2) 참고: 에베소서 3:1-9
11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참고: 마태복음 23장 37-39
118 주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참고: 고린도 전서 15:12-19
119 노예 되었던 우리들. 참고: 에베소서 2장 1-10
120 죄로 죽었던 우리들 참고: 에베소서 2;1-10
121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참고: 에베소서 2장 4-10
122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참고: 사무엘 상 1:21-28
123 그러므로 생각하라. 참고: 에베소서 2장 11-22 절
124 십자가의 역사(1) 참고: 에베소서 2장 13-16절
125 일어나라! 전하라!
126 십자가의 역사(2) 참고: 에베소서 2장 17-22절
Page: (11/19), Total: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