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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에베소서 2장 4-10 |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 육체의 노예로 살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4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중심해서 이상과 같이 소망이 없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살리셨는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살 수 있겠습니까? 노예가 스스로 쇠사슬을 풀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인간 스스로 인간의 못된 욕심들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상의 상황에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몸서리쳐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에 있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첫째로 “궁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이루신 것입니다(4-6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구원 자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을 잘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다마다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1서4장 8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고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같은 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죄의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심으로서 살려 주셨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함께’라는 단어가 3번나옵니다.
“함께 살리셨고” “ 함께 일으키셨고” ‘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누구와 함께 살리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누구와 함께 일으키셨습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입니다. 누구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까?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요한 1서 4장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이요 왕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만이 우리 인류를 위한 죄의 희생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살리실 뿐만 아니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앉히십니다. 인류 역사상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어디 잇습니까?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죄로 인하여 죽었었고, 사탄의 노예로 살았고, 그리고 육체의 썩어질 욕심의 종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새 피조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더 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 1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호령과 찬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상의 약속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인함인줄을 알고 회개해서하나님의 살리심을 경험하고, 일으키심을 경험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사는 성도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시간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음을 확신하십니까? 함께 일으키심을 받으셨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을 소망을 가지고 사십니까?
구원은:
둘째로, 그 은혜를 인하여 얻게 된 것입니다(8,9절).
즉 구원은 궁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원인이 되고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믿는 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인간이 믿고, 안 믿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정 5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시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8절 하반 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도 하고, 그래서 시주도 합니다. 공양도 하고, 자선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못박아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완전히 의로워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선행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산상 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산 믿음의 소유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은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고, 행동과 사랑을 통하여 나타냅니다.
기억하십시다.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선을 행하며 삽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지으셨다’는 단어는 ‘걸작품, 창조적인 작품’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솜씨와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면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에 ‘믿음, 믿음’만 말하지 의와 진실과 선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헐벗은 이웃을 돕습니까? 인생의 길 잃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까? 병들고 낙심한 분들을 돌보십니까?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의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셋째로,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것은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건져내신 것은 그들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명기 6장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넌 후에 제사장들이 밟고 섰던 돌 열 둘을 가지고 나오게 해서 그것으로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개인의 체험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만 머무르면 안됩니다. 고백적인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증거 할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나가서 역사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다음 세대에게 복음의 횃불을 구원의 감격과 그 발자국을 남겨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만 구원받고 끝나는 사람이 있다면, 영적 이기주의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 상)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2장 1,2 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구원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선한 삶,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삽니까? 그리고, 이 구원의 소식을 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나눕니까? 내 아들들과 딸들도 구원 얻어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기도하십니까? 모범을 보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 가정에서 함께 예배하십니까? 주님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믿기는 믿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우리가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주님께 우리들의 문제를 아뢰고 새 힘을 얻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존재의 변화요, 신분의 변화이며, 위치의 변화입니다. 그 결과 삶의 행동과 가치관의 변화,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가는 일군으로 삽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신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신 분은 안게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죄를 용서함 받고 성령님을 받아 ‘새 피조물’ ‘ 새 생명’을 얻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린도 후서 6장 2절을 읽어드릴 때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구원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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