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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에베소서 2장 17-22절 |
우리 고국은 남북 정상 회담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6월 12일 김 대중 대통령과 이북의 대표 김 정일이 평양에서 만나 남북한의 공동 관심사를 토의하게 됩니다. 이번 회담으로 금방 남북이 통일 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단 반세기만에 남과 북이 자리를 같이 한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한 민족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시도는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일이 되기 전에 해야 할 정지 작업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 불균형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상과 문화, 정치 체제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조국 통일에 있어서 이상의 많은 제약 조건을 극복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 하다고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과 북의 다름을 극복할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삶에 실천하고 전하는 살아 있는 신앙인이 어느 때 보다도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하나가 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힘을 모아서 평화의 복음을 전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서 이루신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 세 가지를 묵상했습니다.
첫째는, 인간들이 만든 계명들과 율법을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안에서 새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도니 이유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 결과로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오늘은 17-19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역사에 두 번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말씀을 잘 깨닫고 말씀의 의미를 따라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은 예수님이 평화를 전해 주셨고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17).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마 5:9)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세리들이나 창기들이나 부자나 높은 관료나 군인이나 회당장을 막론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를 따라서 사는 천국 시민이 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 11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평화하고, 이웃과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성도들은 삶에 진정한 기쁨과 환희 그리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잭 힐(Jack Hill)이라는 흑인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아주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출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로 어린 시절과 중고등 학생 시절을 지냈습니다. 인종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줄 아버지, 인도자가 되어줄 아버지, 삶의 본을 보여줄 아버지 없이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그의 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1살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친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을 보며 기도함으로서 미움을 극복하고 아버지를 용서함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들의 사이뿐만이 아니라, 서로 반목 질시하는 사람들 사이를 화평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개인과 개인, 계층과 계층, 그리고 민족과 민족간의 증오를 없애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천대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가셔서 천국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님으로 충만해 진 후에는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와 안디옥과 아데네와 그 당시 세계의 수로로 일컬어지는 로마에까지 가서 이 평화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모셔들여서 하나님과의 평화, 양심의 자유를 얻으셨습니까? 그러면,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십니까? 남편을 용서 할 수 없습니까? 부인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을까요? 나를 못살게 한 친구나 형제나 일가 친척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용서하셨습니까?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관심과 배려를 하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지만 이 일에 있어서 머뭇 머뭇거리시는 분이 계시면 오늘 이 시간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짐을 벗어 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을 실천하셔야 참 기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받은 용서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내게 준 피해는 아주 작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혹시 여려분 가운데 서로의 관계를 망친 일에 장본인이 되신 분이 계십니까? 그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상대편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래야 참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푼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 관계에서 만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남모르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면서 삽니다.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은 고해와 같습니다. 핍박이 있습니다. 질고가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있고, 병들 때도 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때도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평화를 누리시면서 날마다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18).
본문의 배경은 동양적인 것입니다. “나아감을 얻는다.”는 말은 궁전에 들어가서 왕을 가까이 접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사이 말로 한다면, 대통령이 백악관에 초청하여 만나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뵈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어디서나 언제나 경험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없는 은혜를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우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휘장은 예루살렘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인하여 누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궁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실 때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 18:1)고 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두리라.“(마 7:7)고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살고,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서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통하여 아뢰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뢰는 경건의 시간을 게을리 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주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십니까? 가정 예배를 못 보시는 분들은 교회에 모여서 성도들과 교회와 자신의 일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수요 기도모임을 갖고 있는데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왕 믿는 생활을 시작하신 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생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들의 신분이 달 라졌습니다(19).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들의 신분은 ‘죄의 노예’였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도 ‘사탄의 종’으로 살고 죽으면 지옥에 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별 받고 살았고, 차별하며 살았습니다. 미움받고 살고,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가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땅에서 난자인 우리들을 다시 하늘로부터 다시 낳게 하셨습니다(요 1:13).
그리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심으로써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보호해 주시며, 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마지막에는 우리들을 천국에 초청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베드로 전서 2장 9절을 보십시오. “오직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서 우리들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이의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로, 마음의 진실한 사랑으로, 그리고 입으로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우리들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러시면 그대로 하십시오. 사정이 여히치 않은 분들은 기도로라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들에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그 나라 백성이 되어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대사로 삽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서 떠납시다. 평화를 누리면서 삽시다. 임재를 경험하면서 삽시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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