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
그러므로 생각하라.
참고: 에베소서 2장 11-22 절
‘열린 문’ 5월 호 16일 면에는 간디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음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가 영국에 유학 갔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간디는 학생 시절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사회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는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 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위원은 그에게 자리를 제공하기를 거부하면서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교회를 떠났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간디는 만약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그냥 힌두교에 남아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안내위원의 편견은 예수님의 정신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의 신분과 지방과 학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따뜻하게 반겨 주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역하시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같은 유대인이요 은혜를 많이 받은 그리스도인인데도 성장 배경의 차이로 갈등을 격었던 예가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과부들의 구제 문제로 대립되었습니다. 그래서 7 집사를 뽑아서 그 문제를 공평하게 해결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죄 지은 아담과 하와는 서로 상대편에게 책임을 떼어 넘기고,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대하여 불평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창세기 11장에서도, 사람들은 하늘에 닿도록 탑을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지만 언어가 혼잡해 저서 흩어졌습니다. 죄지은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삽니다. 그뿐만 이 아닙니다. 인종과 인종간에 지방과 지방간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에,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간에 심지어는 외모와 피부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 고국 같이 작은 남한에서도 영남과 호남간의 갈등이 얼마나 골이 깊은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리라고 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하신 말씀가운데서 11절부터 13절 말씀을 중심해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분들과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분들 사이에 긴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미국에서 제일 인종 분리 현상이 나타나는 날이 주일날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교단만 하더라도 미국 총회에 많은 소수 민족 교회가 있습니다. 다 각기 자기 민족이 모이는 교회로 갑니다. 영어를 편하게 쓴다고 하더라도 영어를 쓰는 한국 교회로 모입니다. 많은 문화적 교류와 교육이 있는 현대에도 이러니 2천여 년 전 에베소 교회의 형편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러면, 이방인이 유대인들과 달랐던 것이 무엇일까요?

1. 유대인은 할례자였고 이방인은 무 할례자였습니다.
인종적으로 유대인은 셈족이었고 헬라나 로마 사람들은 야벳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차이는 인종의 차이 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할례의 유무는 인종적인 장벽보다도 더 높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 할례의 유래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창세기 17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 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10).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약속 있는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이 할례 문제가 초대 교회 때, 즉 사도 베드로가 사역하던 당시에도 심각한 교회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교회사에 획기적인 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고넬료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 군인으로서 백부장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 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먹었다하니”라고 논쟁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무 할례자를 위한 사도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 하셨습니다. 그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므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를 받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선생님이 교회를 개척한 후 다른 곳으로 가면 유대교적인 사람들이 그 교회에 들어가서 할례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할례를 안 받으면 2급 신자 취급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갈라디아서 5장 2절과 3절에서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 문제 때문에 교회 역사상 처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음이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회의는 유대교적인 기독교와 이방인 기독교가 분리되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그 회의의 결과 사도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간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목매어서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 15:28,29)고 결정했고 편지를 써서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각 교회는 할례와 무 할례를 가지고 불편한 관계를 종식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결정은 이방인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했지 유대적인 의식 준수를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자랑했지만 할례의 중요성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마음과 행도의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 후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할례 문제로 갈등을 갖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의식이나 세례의식 문제로 의견이 많이 갈려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에 사도 신경을 해야 하느냐 안 해도 되느냐? 세례는 물에 잠겼다가 나와야 유효하냐, 아니면 물을 뿌리는 것도 되느냐? 방언을 해야 구원받은 사람이나 아니냐?

사도 신경을 하면 정통이 되고, 안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일까요?
물에 잠긴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안으면 구원 못 받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 받은 강도는 세례를 못 받았다면, 주님의 약속은 무효일까요?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교훈 해 주실 때 “중언 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중얼거리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거듭난 경험도 없이 성령에 인도함 받는 성도의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른 면이 없으면서, 예배의 진정한 의미인 하나님을 높여드리며, 경외하는 마음도 없이 그냥 형식적인 중얼거림을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진정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주님을 왕의 왕이요 주의 주님으로 영접하지도 않고 세례라는 형식을 취한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이 있어야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셔서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입니다.”(4)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이 없는 물에 잠김, 물의 뿌림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종종 근본적인 것은 잃어버린 채, 부분적이고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2. 이방인과 유대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달랐습니다.
로마서 9장 4,5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을 수 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방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사의 물줄기를 이어온 유대인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봉독하신 말씀가운데서 12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산들 가운데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을 5가지로 나열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밖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외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망도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다 이방인입니다. 메시아가 없었으니 죽어 영원한 벌을 받을 사람들이었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는 아예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뽑으신 선민과는 관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없으니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생활을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돌덩어리에 절하고 큰 나무에 절하고 귀신에게 절하고 흙으로 빚은 사람의 모양에 머리를 조아린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한편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도니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 선생님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느니라.”고 로마서 9장 7,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이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그들도 이방인들과 똑 같이 행위나 전통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것에는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에베소 교회성도들이 유대인이었든 이방인이었든 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경륜에 대해서 초점을 마쳐서 서로 감사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조상 때부터 믿어온 분들이 있는 줄 압니다. 겸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이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혹시 미국에 오셔서 새롭게 예수님을 믿게 된 분들도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구원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때 서로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피로 만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칼 막스는 인간의 소외와 분리를 경제체제를 공산화함으로서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공산주의가 어떻게 몰락 되어갔는가를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인간이 서로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주심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주님 안에서 서로 가까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죄를 회개해야 깨끗한 양심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어 상부상조하게 됩니다. 사랑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성령 안에서 배워갑니다. 성령의 충만함에 따르는 생활의 열매가 열립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힘써 지키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편에 대한 이해입니다. 상대편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관심입니다. 이기적이었던 우리들을 주님이 변화시켜 주셔서 이타적인 생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일로 방향을 잡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 13:34,35).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죄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 17:22)

성도 여러분!
죄 지은 인간의 본성은 삐뚤어져서 인간은 서로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익숙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런 죄인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사람되고, 하나님 안에서 새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 성도님들 사이에서 배경의 차이, 학식의 차이, 빈부의 차이, 지방의 차이, 이민 연륜의 차이로 인하여 교회에 분파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보다는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서 지켜 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교만을 버리십시오. 열등의식도 버리십시오. 오직 있는 그 자리에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고 상호협력해서 주님이 영광 받으실 건강한 교회, 한 마음 한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115 사도 바울의 감사와 기도(5) 참고: 에베소서 1장 18-23절
116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2) 참고: 에베소서 3:1-9
11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참고: 마태복음 23장 37-39
118 주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참고: 고린도 전서 15:12-19
119 노예 되었던 우리들. 참고: 에베소서 2장 1-10
120 죄로 죽었던 우리들 참고: 에베소서 2;1-10
121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참고: 에베소서 2장 4-10
122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참고: 사무엘 상 1:21-28
123 그러므로 생각하라. 참고: 에베소서 2장 11-22 절
124 십자가의 역사(1) 참고: 에베소서 2장 13-16절
125 일어나라! 전하라!
126 십자가의 역사(2) 참고: 에베소서 2장 17-22절
Page: (11/19), Total: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