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성녀’ 데레사 수녀가 ‘신의 부재’로고심했다는 보도가 며칠 전에 있었습니다. 이 기사를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께 읽었을 것입니다, 그의 신앙적 멘토였던 분에게 보낸 편지가 ‘내게 빛이 되어 주소서’(Come be my light!)라는 책명으로 출판될 것이다.
1979년 12월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에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전에 정신적 동지인 한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는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거 보려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고, 입을 움직여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문의 제목에 ‘신의 부재’라는 제목은 좀 어색한 것입니다. 아마도 정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은 부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신을 경험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달리 표현합니다.
데레사 수녀의 글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요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 예수님을 일상생활 속에서, 또는 위기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성서에 나오는 기적적인 사건처럼 늘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난제들이 기도만 하면 그냥 실타래 풀리듯 풀리지 않을 때 오는 좌절감들을 그리스돌 믿고 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해오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신앙이 혼동이 옵니다.
이미 봉독하신 본문인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이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와 그의 자매에게는 부모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나사로가 결혼한 것으로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심상치 않은 병을 얻었습니다. 11정 6절을 보면 그들으르 급한 전갈을 들으시고도 요단강 근처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즉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2일이 지난 후 나사로가 사는 마을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즉시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지체하시고, 그 와중에서 오빠의 임종을 맞은 자매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았을까요?
비록 함께 있지 않으시지만, 말씀 한 마디면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무정하실 수 있을까 하고 실망하지 않았을까요?
의지하던 오빠가 없는 미래에 대하여 절망감을 갖고 힘들어하지는 않았을까요?
1950년대에 미국 상원에서 설교하시던 영향력있던 피터 마샬 목사님은 45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부인이신 캐터린 마샬을 그렇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미국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남편을 불러 가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겨우 극복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해 후에 손녀 딸을 보게 되었는데 의사가 10주를 넘길 수 없다는 선고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손녀를 6주 만에 떠나 보낸 캐터린 마샬은 큰 총격속에서 오랜간동안 헤어나오지 못하는 괴로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 왜입니까? 왜, 꼭 그렇게 저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절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도 이상의 사실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있으시리라고 봅니다. 부모님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어린 나이에 부모 둘을 다 여이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 가운데 먼저 떠나 보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아내를 이제 정신차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을 때 먼저 보내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또는 자녀들을 위해서 바로 살고, 모범을 보이고, 기도했어도 주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잠시라도 의심해 본 분은 않계십니까?
우리들이 이런 상황을 만날 때 어떻게 돌파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살펴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옮겨 놓아야 할 무거운 돌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의 무거운 돌문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그당시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직경이 약 1메터 50센치가 되과 두께가 수십 센치가 되는 무거운 돌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섭섭함이 드리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22절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해 주실 수 있으리라는 기대의 말을 하고 있지만 마르다의 말은 ‘안다’는 것이지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이 아님을 그 후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39절 말씀에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마르다가 대답한 말을 보면 알 수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은 영혼이 완전히 육체를 떠나지 않고 시체 주위를 배회하면서 다시 육체로 돌아갈 기회를 찾는 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흘이 되면 신체의 조직이 해체되고 결국 그의 영혼은 떠난다고 믿고있었습니다.
만일 마르다나 마리아도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살고 믿었다면, 주님이 하루만 먼저 오셨어도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엇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그가 주님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준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한 말인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이라는 말 가운데 ‘구한다’는 단어는 ‘낮은자가 높은 자에게 구한다.’ 늘 단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구한다’는 단어를 쓰실 때는 하나님과 동격의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위기를 당하면, 현기증이 납니다. 호흠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존재의 발판이 흔들립니다. 신뢰하고 있는 것의 뿌리가 흔들립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허리를 동일 밧줄은,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시요, 나의 위기에 내게 숨결보다 더 가깝게 다가 오시는 분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대한 섭섭함의 무거운 돌이 닫혀있을 때,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내가 네게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친절은 다 어디에 기억해 두었느냐?
나의 말에 대한 네 믿음의 열매들은 지금 어디에 긴직하고 있는냐?
나에 대한 네 사랑은 지금 어디 있느냐?”
구약 성경을 보면, 특히 시편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개인적, 국가적 위기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셨던 지난날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주님께 대한 섭섭함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무거운 돌문으로 굳게 닫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잠시 회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둘째는, 예수님에 대한 관념적인 신앙의 무거운 돌문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 3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마리아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관념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2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고백적인 신앙 자세를 갖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그결과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마르다처럼 우리들의 신앙도 온전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많은 사랑도 받았습니다. 제자 훈련이니 QT 즉 경건의 시간이니 제직 훈련이니 하는 많은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수료했지만, 살펴보면 관념적인 것입니다.
관념적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구체적 현실에 따르지 않는 추상적인 표상에 치우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적 지식에만 치우치기 쉽습니다. 신학적 논리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어떤 교리나 전통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필요한 것이지만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고,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백성다운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유명한 화가 반 고흐는 그의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는 그 책을 통해서 네가 좋아하는 것, 네가 알고 싶은 것을 찾는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쓴 사람을 알고자 그 책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요한 복음의 반복되는 단어는 “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위기를 당하면 나의 경험, 지식, 논리, 나의 입장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런 귀한 단어들을 관념적으로만 갖고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야고보장로는 “사탄도 하나님이 곗다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관념적, 지식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주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단 사탕만 받아 먹기 원하는 어린아이 신자의 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큰 그릇, 제자로 세워져나가는 길에 따르는 위기, 고난, 역경을 당하면 주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믿음의 장부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검,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실 생활에 적용해셔 만난을 돌파하는 용장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셋째는, 마르다는 불순종의 무거운 돌문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39절에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마르다에게 4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함께 갑니다. 순종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한 여인에게, 슬픔을 당한 여인에게 직접 그 무거운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을 당한 당사자로서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위로하러 온 사람들에게 그 돌을 옮겨 놓기를 부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명하신 것은 자신이 나사로를 다시 살려 줄 것을 믿고 기꺼이 그 명령에 따르는 의지력과 결단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임하여서 주저함과 아울러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가 했던 신앙고백을 상기시켜 주심으로써 마침내 돌을 옮겨 놓는 의지적인 행동을 하게 하셨습니다(40,41). 예수님께서는 먼저 믿음을 촉구하시며, 그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공부만으로 끝나면 공부 한 것이 아닙니다. 한 단계만 한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 여섯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듣기입니다. 다음은 읽기 입니다. 그 다음이 공부 하기입니다. 그 다음은 암송하기 입니다. 그 다음이 묵상하기이고 마지막 열매 맺는 것이 적용하기 또는 말씀대로 행하여 살기 입니다.
험난한 신앙생활의 노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도 가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닥칠 것입니다. 이 때 순종의 의지적인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우리들이 주님에 대하여 섭섭함의 돌을 굴려 버리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줄에 매어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관념적인 ‘안다’의 돌문을 굴려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믿는다’는 고백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불순종의 무거운 돌문을 누구의 도움을 받더라도 굴려 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신앙생활을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슬픔에 동참하신 예수님(우셨다)이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고자 관심을 가지신 예수님(38-40)이십니다. 그의 가정을 버리지 않으시고
위로하시며 가까이 오셨다
-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감사 하시고, 영광을 구하신 예수님이십니다(4).
-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일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최종 목표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통하여 죄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왜’라는 질문 대신에, ‘무엇’이라는 질문으로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왜 이런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위해 제가 해야 할 믿음의 일들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제 생각이 주님의 생각이 되도록 제 생각을 주님의 생각에 맞출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돌문을 굴려 버려서, 나의 마음에, 우리들의 상황에, 시야가 도저히 열리지 않는 환경속,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 생명의
빛이신 주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신 전능하신음성이 울리게 하십시오.
44절을 보십시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죽음의 실재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의 사랑과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 냄새나는 수의를 벗기시고 자유롭게 해 주시는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영광 받는 삶을
사십시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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