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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26-2:5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7절)
인간은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 하는가?
영혼이 있다면 죽은후에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의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하려면 끊임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일반 교육이나 학문 그리고 철학으로는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만족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해답입니다,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한 다윈은 ‘인류의 기원’이란 책을 내놓으면서, 인류가 원숭이와 비슷하다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즉 사람도 다른 동물처럼 진화해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후 인류 진화의 가설은 기정사실처럼 인정되었습니다. 그 바탕위에서 그것을 증거하려는 갖가지 노력이 있었고 이에 따라서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발전단계였다는 유인원을 찾느라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스트랄로피테스쿠’라는 유인원에 대해서 학교 교과서에서 배우셨을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주커만 경은 이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연구한 후에 그것은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류의 기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유인원이라고 널리 알려진 자바인(피테칸트로포스)은 바로 발견자인 화란의 외과의사 듀보아 자신이 죽기 전에 “자바인은 단지 커다란 긴 팔 원숭이에 불과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예만 더 들고 성서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독일 뒤셀돌프 근처에 있는 네안데르 계곡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1백만전 전의 인간이었다고 알려진 ‘네안데들달’인은 반쯤 서서 다녔던 유인원이었다고 주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관절염으로 불구였으며 비타민 D의 부족으로 곱추병 환자였다고 보고했습니다. 현재로서의 결론은 사람이거나 원수이지 그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인간이 죄로 ㅊ타락해서 멸말할 수 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생명고 새 세계를 부여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문화적 진화는 결국 지상 천극을 인간의 힘으로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해 왔습니다. 서방 7개국의 수뇌들이 며칠전 회담을 가졌습니다. 핵무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 하나만 보아도 인간의 문명의 발전과 진화가 해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인류가 성서가 말씀하시는 바 ‘인간이 무엇인가?’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임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보면, 첫 인간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란 ‘흙’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제 6일째날에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동물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육체를 가졌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26,27절을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곧 ‘IMAGE’의 소유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음 몇 가지 점만 살펴 보아도 우리은 동물과 다른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추리력도 있습니다. 창조성도 있습니다. 인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사용해서 새로운 것들을 고안해냅니다. 요즈음 아프리카에는 사막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목초지가 점점 황폐해져서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을 한 미국 여성이 일생을 아프리키에 가서 넓어지는 사막을 좁히기 위해서 생존능력이 강한 풀들을 심고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천년 전의 부엉이 집이나 오늘날의 부엉이 집이나 거의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 전의 인간의 주택과 오늘날의 주택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성을 사용해서 학문과 예술과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바로 사용하고 잘 다루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일에는 이성을 잘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믿으면 학교 공부는 필요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성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잘 교육받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이성을 사용하도록 훈련하는 교육의 체계가 있는 현 교육 제도를 개선해야 하지만, 교육자체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는데 이것을 바르게 잘 성장시킬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돼지들 중에 강한 것이 약한 것들을 밀어 부치고 찌꺼기를 다 먹어 치운 후 눈믈을 흘리며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개들이 서로 심하게 싸운 후에 싸움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돼지나 개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어 보신 젓이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과 동물과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을 보면, 인간이 육체가 되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간곳 없고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서만 사는 인간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서 우리의 육체가 “성령의 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86편을 보면, 다윗은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면만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과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야곱의 우룰가로 왔던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어떤 인간적인 환경의 조건의 변화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유물론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합니다.혹 육신이 있을 때는 있을지 모르나 사람이 죽으면 동시에 없어진다고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우주의 법칙 가운데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가령 차관에 있는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되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변화를 통해서 공기가운데 수증기로 분산된 것 뿐입니다. 초가 타면 초 속에 있는 탄소가 없어지면서 화학적인 변화로 탄산까스가 됩니다.
인간이 죽으면 육신에는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철분으로, 인으로, 칼슘과 탄소 등으로 변합니다.
육체의 형태는 변하지만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아주 없어집니까?
하나님이 계신 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 또한 불멸합니다. 인간이 죽은 후의 인간 영혼 상태에 대해서 성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에게”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은 영생과 영벌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이성을 사용해서 학문과 과학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금자팁을 이룬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발전이 꼭 인간의 행복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과학적 발전으로 인하여 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전쟁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어떻습니까? 이성의 발전과는 반 비례해서 인간의 양심은 점차 그 기능이 약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 전서 1장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서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양심이 마비되어가는 것은 물론, 교회에 나오는 분들 가운데서도 세상적인 표준 정도를 사는 분들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 하니까”가 아니라 “… 하여도”나는 주님이 주신 양심의 법을 지켜 가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고쳐질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오전해 지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온전히 죄를 용서 받아 새 피조물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죄 용서함과 성령님을 받습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구약 에서겔 37장 5절 이하를 보면 죽은 마른 뼈들에게 다시 생명이 생기는 환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 그것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새 생명,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나타남을 봅니다.
어거스틴은 “오 주님 내가 주님을 알기 전에는 나의 마음에 평안과 만족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고 완성해 가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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