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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4:1-2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니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4장 9절)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들이 자라서 가인은 농사짓는 일을 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산물으르 아벨을 양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열랍되고 가인의 제사는 열랍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분을 품게 된 가인은 어느 날 한적한 들판으로 동생을 유인해서 돌로 처 죽였습니다.

오늘묵상할 말씀은 첫 살인자 가인을 찾아 오셔서 하신 말씀과 하나님을 떠난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미 읽으신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에 대하여
•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찾아 오신 하나님과 가인의 대답에 대하여
• 가인의 후예들에 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이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의에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매 주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아니 매일 매 시간이 주님 앞에서 산 제사를 드리는 시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를 받으실까요?

첫째로, 하나님께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미개한 문명에 가더라도 인간은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어서 예배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저나름대로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어떤 사람은 명예와 권력을, 또는 어떤 사상이나 사람등 많은 신을 가지고 삽니다. 때로는 목석을 세워서 신으로 받들기도 합니다. 종교학에서의 “신은 사람들이 생명과 그외의 모든 것을 바처서라도 얻고자 하는 유형, 무형의 것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했습니다.
그런에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제물 때문일까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아벨을 양을 잡아 하니님께 드렸기 때문에 제물이 열랍되었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보면(신명기 26: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곡식 예물도 받으셨음을 봅니다.
양 뿐만이 아니라 소나 염소도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드릴지라도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가인의 제물은 안받으셨을까요?
4절 말씀을 보면, 아벨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그냥 드렸습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아벨을 정성을 드려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정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땅의 소산을 제물로 삼았을 뿐입니다. 아벨이 하니 그냥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상의 예측보다는 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생활에 죄 문제가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 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었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벗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 위하여 통회하는 마음과 진심으로 정성껏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을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자마다 저가 “살아계심과 후하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선하심을 믿고 순종 함으로 나와 예배하는 자를 기뻐 하십니다.

유다서 11절과 요한 1서 3장 12절을 보면, 가인에 대하여 “그는 악한자에 속한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의 행위가 악했다.”고 하셨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여호와께고 겸허하게 나가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유익이나 자기의 수고를 나타내는 전시적 예배요, 죄의 회개 없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채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아벨은 드리는 제사였고, 가인은 보이는 제사였습니다.

우리들이 예배을 드리러 왔는지, 보이려고 혹은 보려고 왔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험금을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헌금 내는 것을 보이려는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회개하며 통회하는 예배를 드리는지, 아니면 예배하러 와서 성전 뜰만 밟고 가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 문제를 그냥 가지고 예물만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 가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들째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열랍되지 않았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누구신데 감히 안색이 변했습니까?
이런 상태에 있는 가인을 하나님은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물으시면서 그의 제사가 열랍되지 않은 이유를 7절에서 친절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권면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 문제, 정성없는 제사에 대한 충고, 이웃과의 얽힌 문제의 해걸을 말씀 하셨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살해하려는 자기의 계획을 구체화했습니다.
하루는 동생을 꾀어내서 들로 데리고 가서 아우를 쳐 죽였습니다.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이 다시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돌로 쳐 죽이고도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가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십니다. 또한 아벨의 피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상실한 가인이 갖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11,12).
그가 땅을 갈아도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즉 헛 수고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벌 나비 같은 인생을 삽니다. 삶에 안식과 평안이 없습니다. 부족한 일생, 불만족한 인생, 불만과 염려로 점철된 인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아니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교만의 죄입니다. 형제를 죽이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형제에 대하여 욕하는 것, 무시하는 것, 무관심한 것도 죄라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가인은 자신을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죄의 벌’이 너무 중하다고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쫓아내신다고 오히려 불평불만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기도 가운데, 환경이나 성도들의 권면등 여러 방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실 때, 즉시 회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거나 저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경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웃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들이 돌보아 주어야 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들을 돌보고 격려하고 삶이 아름답도록 돕습니까?

원망과 불안과 공포에 찌든 가인에게도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심을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피를 피로 보복함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그래서 그에게 어떤 표를 주셔서 누구에게든지 죽음을 면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표시를 해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7장을 보면,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와서 14만 4천명에게 그 이마에 도장을 직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가인이 죽음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표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표를 주셨음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유리 방황하게된 가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셋째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갔습니다.

16절을 보면,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후로 인간의 비 인간화와 세속화가 싹트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유리 방황하는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사람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을 쌓았습니다. 그가 불안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에녹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녹’이란 말에는 ‘창시자’또는 ‘전수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이 도시 문화의 창시자임을 과시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지은 이름의 의미는 창세게 5장 19절에 나타난 셋의 후예(하나님을 섬김)의 이름의 의미와는 그 내용상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아랏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들나귀’ 또는 ‘광야의 도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방황하는 야생적인 인간상을 상상하게 합니다.
아랏의 아들 므후야엘은 ‘하나님께 가책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므후사엘은 ‘미심적게 죽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상의 이름들이 보여주는 바를 보면 그들은 결코 행복한 존재들이 아니었음을 발견합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은 ‘힘이 있는 사람’ ‘정복자’ ‘야생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24절을 보면 그를 해칠 자가 없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살인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그는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은 인류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부인 ‘아다’는 ‘장식품’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다른 부인 ‘씰라’의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는 ‘매혹적인 여자’라는 뜻입니다. 라멕이 선택한 두 여인의 인격적인 면은 나타나지 않고 노리개 같은 여인,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여인들을 선호한 것을 봅니다.

그의 자녀들을 보면 목축의 조상이 된 야발은 ‘생산자’, 유발은 ‘아름다운 소리’두발가인은 ‘가르치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으로서 동철로 날카로운 기구 즉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딸 나아마의 이름 뜻은 ‘괘락’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걸어간 길은 하나님이 내리신 복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육적인 것들, 살인적인 것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 나름대로의 기쁨과 쾌락을 찾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출애급기 20장 5,6절을 보면,’나를 싫어하는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까지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까지 물려지는 조상이 되고자 하는 분들은 안 계시리리고 봅니다. 우리들은 수 천대의 후손까기 복의 물줄기가 흘러 내려 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먼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습니다.
이민 1세로서 후손에게 무엇을 물려 주시고 싶으십니까? 우리들이 한 결정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온 신앙 생활 때문에 후손들이 명예롭고 자랑스런 후손이 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랑스런 조상이 되려면,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유리방황하는 삶은 정리 해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혹시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회개하여 삶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립니까?
- 우리들의 이웃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고 삽니까/?
- 우리는 어떤 조상이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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