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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1-24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들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네 눈이 성하면 온 몸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마태 6:22)고 하셨습니다.
눈은 사물의 형태와 진실을 파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신체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편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세계에서도 눈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우주관이니 인간관이니 혹은 인생관이니 하는 ‘관’(볼 觀)자를 씁니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인생과 사물을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 가지 눈(시야)이 건강해야 합니다. 밖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자기 안을 보는 자기 성찰의 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미래 그리고 영원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한 개인이 어떤 관점을 갖는가 하는 것이 단순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갖는 갖가지 관점이 모아져서 윤리 사상 체계와 사회 제도를 형성합니다.
유사이래로 인생관의 두 가지 양 극단이 있어왔습니다. 그 하나는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것입니다. 전제 군주 정치에서는 백성은 하나의 도구요, 인간은 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에서 인간은 한갓 공산주의 혁명의 도구처럼 전락되어서 국가 계획의 한 부분품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날이 갈수록 인간의 가치는 물품 조립공장의 한 부분품처럼 되어가는 듯합니다. 그래서 삶의 가치를 상실해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너무 높게 봅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천도교에서는 ‘인내천’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즉 사람이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년 여름에 로마 교황이 미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천국의 열쇠를 쥔 베드로의 후계자라 하여 대단한 존경을 받습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뜻한 바 한 길을 걸어 온 것에 대해서는 존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이 받아야 할 존경과 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느라고 매우 바쁜 것 같습니다. 반면에, 신교 내에서는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이단 종파에서는 인간을 세뇌해서 그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하나의 통계 숫자에 오르내리는 정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바른 인간관을 갖게 됩니다. 오늘 묵상할 말씀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에 나눈 말씀에 이어서 오는 묵상할 말씀은
사람은 거룩한 명령과 사명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후에 1장 28절에서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천하 만물에 대한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셨고, 만물을 지배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 때 우연이나 숙명적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거룩한 명령을 받은 존재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계명에서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계명들의 뿌리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사명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3절을 보면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 형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신으로 받든 적이 있습니다. 사사 시대나 왕국시대에도 이방 신들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그러면 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는 곧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인격적인 삶을 통한 값진 열매를 얻고자하는 것이 아닌 우연을 바라는 인생관의 한 가지입니다. 인격적, 도덕적 그리고 영적인 헌신의 결단이 없이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의 봉우리가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데살로니까 교회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살전 1:9)
현대인들이 섬기는 여러 우상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물질, 또는 돈의 우상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한한 행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란 순간적인 것입니다. 성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잘 벌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서 속이거나 악한 방법을 동원하며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됩니다. 물질을 우상처럼 모실 것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선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담은 동산에서 일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2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2장 19절을 보면,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일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관찰이 필요합니다. 일을 하는 데는 계획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에덴 동한에 얼마만큼의 동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담은 그가 가진 지성을 동원해서 가장 알맞는 이름들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잠언에서 솔로몬은 게으른 자들에게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경고했습니다
셋째로, 인간은 거룩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신 절대적 질서입니다.
‘에덴’이라는 단어의 히브리 말의 뜻은 ‘기쁨’ ‘즐거움’ ‘행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산이라는 말을 영어로는 “garden’으로 번역했는데, 원래의 그 의미는 ‘paradise’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친히 지으신 후에 ‘행복의 파라다이스’에 두셨습니다. 거기에는 갖가지 아름다운 과일 맺히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며 흐르다가 네 줄기의 강의 근원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순금과 보석 그리고 향료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 지식의 나무도 두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인간을 타락하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언약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인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사랑할수록 지켜야 할 약속과 질서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거룩한 약속을 지킬 때에만 행복이 있음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의 행복 조건은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법칙 즉 하나님과의 약속을 삶의 한 가운데 두고 범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간은 반려자가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서로 돕고 사랑하는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가 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그리고 배우자와의 만남은 한 사람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을 일컬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왜 아담에게 배우자를 주셨습니까?
* 에덴 동산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담을 돕기 위해서입니다(2:20).
*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을 위해서 배우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자녀를 낳고 땅에 충만이 퍼져서 행복하게 사는 일을 위해서입니다(1:28).
* 부모를 떠나 더욱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가정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배우자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 ‘하인이 된다.’는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반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명령을 함께 순종해서 이루는 동역자입니다.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결혼해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저 세상적인 필요를 넘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서로 힘을 모으고 격려해서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며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목적을 위해서 배우자를 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는 일을 위하여 배우자를 주셨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부모님들에게 자랑이 되며, 하나님이 쓰시는 가정이 도게 하시려고 배우자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입니다. ‘심히’라는 부사를 넣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의 증거가 인간에게 사명을 주시고, 거룩한 명령을 주시며 그리고 동역자를 세우셔 하나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게 하셨음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신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셨던 그 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기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려는 교만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님의 구원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음으로써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사명과 명령과 동역자와의 바른 관계를 맺는 은혜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신령한 하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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