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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하시고 사십니까?
참고: 마태복음 25:31-46
신약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4복음서의 1/3이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사건과 부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봉독하신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중 화요일에 주신 말씀 중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설교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설교의 주제를 재림으로 정하셨습니다.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신 후 성경대로 3일만에 부활하실 것만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주, 성결케 하시는 주, 신유의 주, 그리고 재림의 주를 믿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를 위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13절까지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라’고 교훈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6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올 모든 일을 피하고”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4절부터 30절 까지는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어떻게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그리고, 31-46절까지의 말씀은 ‘비유’라기 보다는 아니라 심판에 대한 ‘묘사’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살펴 보면

첫째로, 주님이 영광 중에 오실 때에 모든 사람이 앞에 불러모아질 것이라고 3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불러 모은다”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기억하시지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11,12절에서 사도 요한은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악한 자들도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7절 하반 절과 8절을 보면, “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 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에 싸여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실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읽으신 마태복음 25:31절에서는 불꽃에 둘러싸여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 올 때에”라고 묘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천년 만년 이땅에서 살 것처럼 삽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에 동참할 그날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고대하면서 신음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려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을 보면, 주님을 모신 흰 옷 입은 두 천사들이 이렇게 말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때에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신면서 사십니까?
그런데, 누구나 이 때를 잘 준비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버나드 쇼는 그의 묘비에 이런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죽었습니다. “머뭇 머뭇 하다가 이날을 맞이하게 될 줄 알았다.”

우리들 가운데 지금 형편이 좋아서, 건강해서, 아직 젊어서 차일 피일 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젊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다 수명을 채우고 가는 것도 아니지않습니까?

부활절을 지내신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 만날 그날을 준비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의 판단 기준은 그들의 삶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32,33절을 보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 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목동들이 낮에 섞여 있던 양과 염소를 밤이 되면 종류대로 나누어 우리에 넣었습니다.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오른 편에 세우신 양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35,36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염소 편에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12절 하반 절을 보면, 심판하실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 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 받았습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행위로 구원 받습니까?
우리들이 잘 암송하고 있는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의 말씀에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하나님의 선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로만 구원 얻습니다. 천하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 받는 길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행위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야고보서 2장 26 절을 보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반석 위에 세운 집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도 그의 서신에서 초반부에는 구원의 교리를 잘 설명해 주셨지만 후반부에서는 그 교리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살아야 하는가?를 강조하셨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1-11장 까지 교리적인 것을 말씀하셨고, 12장 1절부터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동전의 양 면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학식, 신앙 연륜, 명예나 권세에 초점을 맞추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즉 주님이 관심을 두셨던 사람들에 대한 삶의 배려였습니다. 가난한자, 병든 자, 헐벗은 자, 갇힌 자, 소외된 자, 실패 자등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승리자들에게는 수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듭니다. 그러나 실패자, 낙오된 자, 헐벗고 가난한 자들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성공입니다. 부입니다. 명예입니다. 그것을 따라잡기에 힘겹습니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도 없습니다. 남이야 죽던 살던 관심 없습니다. 우리는 낮은 곳을 싫어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이 나옵니다.
이사야서61장 2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난한 자, 병든 자, 세리와 창기들,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 즉 그 시대에 인간 취급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소외된 한 여인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동네에 머무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적용) 우리가 사는 현 시대에도, 고난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가난과 질병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 여정에 강도 만난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경건만을 유지하려는 신앙태도로만은 부족합니다. 자신의 성실성을 발휘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는 청지기로만은 부족합니다. 낮은 데로 임하신 주님처럼, 슬픔과 고난과 실의에 빠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찾아가는 사랑과 긍휼을 가진 적극적인 신앙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월트 디즈니는 3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 유익보다는 해를 끼치는 인간.
- 자기집 잔디를 깎는 것처럼 사는 인간.
- 그리고 유익과 도움을 주는 인간입니다.

구약 출애급기 22:22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듯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서는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 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헐벗은 사람은 없습니까? 병든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사람.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을 없습니까? 그분들을 만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의 아픔을 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의인들이 “주님 언제 주님께 우리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이 보잘 것 없는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병든 분들을 심방 하시고 위로하시며 가족을 격려하신 것이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주님께 한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에게 남 모르게 구제한 것이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주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 만날 날 칭찬 받을 일을 준비하시면서 사십니까?

셋째로, 심판의 결과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 하면 아주 전 근대적인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천국, 지옥 설교가 인기가 없다고 합니다. 웰 빙 라이프에 대한 인기가 높습니다. 이 땅에 살 때에 잘 살고 건강하게 살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영원한 미래가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의인들이 갈 곳이 있습니다. 34절 하반 절을 보면,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고 말씀하신 나라가 있습니다. 의인들은 46절에서”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저주 받은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41절을 보면, “저주 받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46절을 보면 “영원한 형벌”이 있는 곳으로 갈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았습니까? “이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코너스톤 교회 성도여러분!
주님 만나실 그날을 어떻게 준비하시면서 사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성경은 말합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지 말라’고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사랑할 만 하고, 지위도 있고, 사귀어서 유리한 사람들에게 만이 아니라, 도움을 주어야 하고, 상처를 싸매 주어야 할 사람, 고난과 역경, 실패와 시련의 그늘에 있는 사람에게 향한 것,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기를 원하십니다.

맥스 루캐이도 목사님이 쓰신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한 불랜챠드 중위가 2차 대전을 마치고 약1년 반 정도 펜팔로 사귀던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간 로맨스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뉴욕 펜실바니아 기차역에서 저녁 7시였습니다. 중위는 군복을 입기로 하고, 여자 분은 그날 옷깃에 빨간 장미를 꽂고 나오기로 되었습니다. 불랜챠드 중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데, 저녁 7시에 자신의 앞으로 다가 오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그의 예쁘장한 귀 밑으로 금발 머리가 흘러내렸으며, 눈은 파란 색이었습니다. 입술과 턱은 품위있게 다물어져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옅은 초록색 정장은 마치 봄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중위는 그녀가 장미꽃을 꽂고있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마주 걸어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해군 아저씨, 제가 좀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면서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를 보니 40이 넘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잿빛 머리에 다 헤어진 모자를 쓰고서 장미를 꽂고 다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실망했습니다.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홀리스 메이넬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 중위는 그 여인을 정중하게 맞이 했습니다. “홀리스 메이넬이시지요?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녁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을 때, 웃음을 참느라고 그녀의 얼굴이 커졌습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젊은 양반! 방금 지나간 초록색 정장을 한 젊은 처녀가 옷에 이 장미를 꽂아달라고 간청을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저녁을 초대하면, 그땐, 길 건너편 저 레스트랑에서 자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어요. 일종의 테스트라나요!”

맥스루 캐이도목사님은 이 글을 쓰시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려면 매력 없는 것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을 보라고,
가장 작은 자들, 가난한 자들, 고난 받는 자들, 억눌린 자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사는 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삶에 여정에서 괴로와 몸부림치는 분을 아십니까?
삶이 절벽처럼 보여 아예 포기한 사람들을 아십니까?
삶에 노도광풍 몰아쳐 침몰해 가는 누군가를 아십니까?
그분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처럼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신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을 찾아주고 전화하고 편지 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주님 만날 그날을 준비하시겠습니까?




Number Title Reference
163 중심에 호산나 (엘림장로교회040509) 참고: 마태복음 21:1-11
164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참고: 요한복음 14:1-14
165 어둔 세상, 밝은 행실 참고: 로마서 13:11-14
166 준비 하시고 사십니까? 참고: 마태복음 25:31-46
167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참고: 히브리서 12:14-29
168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참고: 마태복음 6장 5-15절
169 목적 있는 섬김인가? 참고: 창세기 24장 10-14
170 나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 참고: 디모데 후서 4:9-18
171 이제부터는 참고: 에베소서 4:14-16
172 어떻게 살까? 참고: 전도서 11:1-8
173 베뢰아에서 일어난 복음의 역사 참고: 사도행전 17:10-15
174 건강한 신앙공동체의 길 참고: 빌립보서 4장 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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