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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빌립보서 4장 4-7절 |
“천지의 대 주재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교회설립 6주년을 맞은 운광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부흥케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게 하소서.”
주후 63년경에 한 늙은 죄수가 자신이 개척한 지 약 10여년이 되는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 교회가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두 여성 지도자의 불화로 인하여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두 여성 지도자에게 권하기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두 여성 지도자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 될 것을 권고하신 후, 교회 전체 구성원들을 향해서 어떻게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빌립보 교회입니다. 편지를 쓰신 곳이 어디입니까? 로마 감옥이었습니다. 누가 썼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 입니다. 그리고 두 여성 지도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였습니다.
6년 전에 주님은 여러분들을 통하여 운광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어떤 교회로 계속 성장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건강한 교회가 될까요?
중심 되는 말
이미 봉독하신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건강한 교회 구성원들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본 절의 핵심적인 단어는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어떠할 때, 운광 교회가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주 안에 있고’, ‘기쁜 삶을 살 때’ 입니다.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받고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분들 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령의 역사가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참 기쁨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는 “볼지어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함께 사는 생활은 문자 그대로 기쁜 생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마약, 음주, 비 정상적인 생활을 추구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감정과 환경의 변화와 관계 없이, 주님께 더 깊이 안기는 생활을 추구합니다.
언제 기뻐해야 합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기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잘 아시는 데살로니가 전서 5:16절에도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나쁠 때에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열쇠는 “주 안에”서만 있습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우리 주님 안에서 시야를 넓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교회 안이든지 밖에서든지 기쁠 때든지 슬플 때든지 영혼의 주소를 “주 안에” 두면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의 약속을 믿으십니까? 때로는 사업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도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주 안에 있으면, 주님의 약속을 잡고 주님 안에 있으면, 눈물과 상처의 골자기가 변하여 샘물과 회복의 골자기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운데 혹시, 어려움을 당하신 분은 안계십니까?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네가 불속에 있어도, 물에 빠질지라도 구해 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화 : 독립문 성결교회 튀각 장수 아주머니.
주 안에서 기뻐하는 성도는 이웃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살까요?
5절 말씀에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셨습니다.
2. 건강한 교회는 성도들이 관용의 삶을 삽니다.
성도들은 자연히 서로 만나게 됩니다. 인간 관계가 형성됩니다. 공동체를 구성하게 됩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는 상호간에 ‘관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관용’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헤피에이케스)라는 말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한’이라는 말을 한마디로 번역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는 온화한, 관대한, 친절한, 양보하는, 합리적인 등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자신의 개인적인 권리를 기꺼이 친절하게 양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편의를 베풀고 은혜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교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갖는 태도는 ‘관용’입니다.
이 관용을 누구에게 베풀어야 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극히 제한된 친한 사람에게만 관용을 베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혹시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너희로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고 하셨습니다(마태 5:40,41). 42절 말씀에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배경이 다 다릅니다. 성격, 연령, 성장 배경, 신앙 경험이 같지않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복된 삶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내어줍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분위기가 어떻겠습니까?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까?
5절 후반부를 보면, “주께서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2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공간적으로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주님은 내 숨결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아니 내 안에 계십니다. 시간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릅니다. 가령, 어떤 성도들이 상호간에 화해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반목하다가 세상을 떠나거나, 주님이 재림하시면 얼마나 민망한 것입니까?
예화 : 어떤 목사님의 질문 “다른 사람을 한 사람도 미워하지 안는 분 손들라고” 하자 어떤 노인이 들음. “다 죽었어요.”
성도 여러분!
원수진 분은 안계십니까?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은 분은 안계십니까?
성도간에, 부부간에, 부자간에 때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이웃을
용서하십시오. 화해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성령님을 근심
시키지 마십시오. 뜻 깊은 오늘 주님 안에서 해결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용서할 줄 모르는 왕의 종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1만 달란트: 100데나리온,
건강하고 행복한 교인, 건강한 교회의 모습가운데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6절을 보십시오.
3. 성도들이 염려 대신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삶에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일이 있을 때 무사태평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를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근심 걱정합니까?
염려는 “어떤 주어진 상황을 제대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느낄 때 갖는 감정입니다.” 잠언에서 솔로몬은 “즐거움을 양약이라도 근심은 뼈를 삭이느라.”고 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하는 염려 가운데 40%는 쓸데 없는 것을 가지고 한다고 합니다. 30%는 불가항력적인, 즉 우리들의 능력 밖의 것을 가지고, 10%정도는 가족, 친지 등 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염려한다고 합니다. 오직 8%만 염려할 것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많은 염려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염려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이요, 정욕적인 욕심으로 인한 염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염려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가정을 위한, 자녀를 위한, 생업을 위한 염려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한 염려와 근심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1절에는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또 염려하여 이르기를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염려를 대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뢸 때는 “기도와 간구”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와 간구는 개념상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 전체를 말합니다. 간구는 보다 무엇인가 특별히 필요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고, 그 분에게 우리의 문제를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처리하실 일일 때는 주제 넘게 우리가 맡아서 처리 하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기고 염려가 생깁니다.
모세도 아말렉과 싸울 때, 사무엘이 불레셋과 싸울 때, 다니엘이 신앙적인 위기에서,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 간구했습니다. 기도로 승리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신앙의 용장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기억해야 할 우리의 태도가 있습니다. 그냥 강짜만 부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태도는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믿음의 기도요, 응답을 미리 보고 감사하는 기도요, 전에도 응답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믿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 걱정이 우리 앞에 있을 때, 기도와 간구로 주님께 나아가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뢴 성도들에게 주시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께 아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로 마음의 평정을 갖게 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주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시편 29편 11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평강이 어디에 임합니까?
7절 하반 절을 보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내면 세계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심장부를 움직이십니다. “지킨다”는 단어는 군대 용어입니다. 적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보초를 서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어도 우리 내면에 능력을 주셔서 능히 돌파하게 하십니다. 이 평화는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옥에 갖혀서도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달 열리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려났습니다.
운광 교회 성도 여러분!
사실 기도하십니까? 염려만 하십니까?
염려를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 넘치도록 응답 받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건강한 교인, 건강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있을 때 넘어져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늘 차고 넘치는 행복한 교인,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맺는 말
교회는 다니시는 데 참 기쁨이 없는 분은 안계십니까?
점검해 보십시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셨는지? 주님을 영접해서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분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의 맨 밑에는 기쁨이 없고 아주 음울한 사람들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지금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께 나오십시오.
여러분, 주 안에서 관용을 베푸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 아닙니까? 주기도문을 어떻게 외우십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 서로 용서하셔서 관용을 베푸시지 않겠습니까?
운광 교회 성도 여러분!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셨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참 평안을 주십니다. 누가 복음 24장 36절에는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시고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을 주시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믿으십니까? 지금 이 큰 믿음을 소유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세가지가 있는 성도는 건강한 성도입니다. 행복한 성도입니다.
이 세가지가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행복한 교회입니다.
운광 교회 위에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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