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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7-37
요한 복음  11:17-3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I. 들어가는 말
 
  • 인생살이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 사랑하는 배우자, 자녀, 부모와 친지 또는 친구들과의 사별이다. / 나사로의 여동생들 / 부모도 세상을 이미 떠남, 가정을 이끌고 생활을 책임지고, 자기들의 미래의 버팀목이 되었던 오라비의 죽음…
  • 왜 그런가? – 나의 존재와 연결되었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즉 나의 한 부분이 소멸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함께 했어도 힘겨운 인생의 풍파를 혼자 지고 가야할 무기력이나 절망감 때문이다.
  • 이런 일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극복하여야 하는가?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간에,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읽으신 본문에서 예수님을 진실히 믿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태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주님이 좀 도와 주셨더라면….” “하나님이 꼭 이렇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 대한 사랑이시란 말인가?” 등의 반응을 가질 수 있다. 조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더라면…” “다른 의사에게 조언을 받았었더라면 ….
 
전에 병원에서 전도하신 여전도사님의 이야기 / 어려움이 올 때에 신앙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기회도 된다. “위- 위험하다. 기 – 기회가 될 수 있다” 슬픔과 절망이 있을 때에 눈물을 많이 흘린다. 이 눈물이 나를 썩일 수도 있고, 영원을 보는 렌즈가 될 수도 있다.
 
II. 중심되는 말
 
1. 나사로의 죽음을 인하여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베레아의 베다니에서 이틀을 더 묶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 키로 떨어진 베다니에서, 말씀을 증거하시던 요단강 건너편 베레아의 베다니라는 마을 까지는 약 32 키로가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와서 소식을 전한 사람이 하루, 예수님이 이틀을 머무시고, 또 하루를 거려서 오셨으시 나흘이 됩니다. 아마도 사람들을 예수님께 급히 보낸 후에 나사로는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유대 나라의 기후 때문에 죽으지 하루 이내에 무덤에 안치한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죽은 사람의 영이 삼 일간 무던 주위를 배회하다가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나흘이 되었으면 심하게 부패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다시 회생한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올라버니가 죽은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위로하는 것 뿐입니다. 함께 울어주고 곡을 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동네 사람도 위로하기 위하여 왔겠지만,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유다 사람이 그 오라버니의 일로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졌던, 바리새인, 율법학자들, 대 제사장들을 칭한 단어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이 가졌던 영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함마슐드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에, 얼마난 많은 사람이 기뻐했는가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애도하는 가로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한 그분이 비행기 사고로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온 세계에 평화를 위하여 일하다가 떠난 그분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애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에 살 때에 선한 영향력을 나누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는 남겨 두고 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함께 우는 것 외에는 앞 날을 위해서 염려해주고 보살펴 주는 일 외에는 근본적인 대책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픈 눈문과 한숨과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곳에 예수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인간이면 모두 다 당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실 분이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소망은 사람들의 위로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값진 향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그러합니다. 어떤 일이 우리를 슬픔과 좌절로 몰고 갈지라도, 사람들의 위로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힘이 되지 못해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셨음을 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유대인의 전통에는 조문객들이 오면, 가족들이 집 안에서 그분들을 맞아들이고 위로의 말을 듣고 함께 울곤 하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이런 전통을 따라서 많은 조문객들을 맞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두 자매 가운데서 매우 활동적인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한 말은 예수님에 대한 서운함이 배어있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이 말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러 나온 마리아도 똑같이 했습니다(32).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우리도 예수님께 아쉬운 마음을 토로합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들 땍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신학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때에 살아나겠지요.’라고 했습니다. 39절에서 마리아도 무덤 앞에서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가장 많이 인용된 유명한 말씀인 25, 26절로 마르다에게 대답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25, 26절의 말씀은 요한 복음이 제시하는 “나는 …이다.”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즉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본성을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하는 어구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만 계십 분이 아니십니다. 지름 여기에도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나?”고 질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압니다. 성경도 공부합니다. 기도도 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전능하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여기에서 나와 마주하시고 계신것을 믿으십니까? 만일 주님의 임재의 현실화를 믿고 그대로 산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변할까요?
 
마르다는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당면한 상황을 다 아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에, 나의 상황과 슬픔을 넘어서 전능자 앞에 선 그 순간을 깨달은 마르다가 한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으니 세상에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우리의 상황에 주님의 빛과 인도가 비추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지 못할 것 같은 시련과 절망과 슬픔의 벽에 막혔을 때일지라도 나를 만나시려고 서 계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우리의 아픔과 예수님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푸념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고백하는 더 높은 신앙 고백과 성장을 통하여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디 엘 무디가 세상을 떠날 때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신문에서 읽으실 때에 믿지 마십시오. 저는 주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한 마리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지만, 아직도 아쉬운 마음, 섭섭한 마음이 가슴속에 있는 마리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데리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한 말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마르다가 한 말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발 앞에 엎드려서 말씀 드렸습니다.
 
마리아가 나가자 조문하러 왔던 사람들이 따라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따라 나온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자를 짜르는 듯한 괴로움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비통해 하시면서 통곡하실 때의 단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도 우신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서, 죄로 인하여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고, 아끼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죄의 영향력에 사람들이 굴복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죽음을 부활과 영생을 바꾸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의 댓가를 지불하시고, 죽으신 후에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이 주님을 믿어 온전히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부활과 영생의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언젠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분은 죽지 않는 영생의 복락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시시는 예수님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셨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분이 왜 나사로는 죽게 하였을까를 서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베레아 지방의 베다니에서도 말씀을 병을 고치시거나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편을 통하여 아신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4).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치는 일보다 먼저 베레아에서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영광을 받으실 일을 위하여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시면 생명이신 것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질 부활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려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방법은 복음 증거와 치유를 통해서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 일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적을 두고 사역하셨습니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는 일,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사역도 이런 원칙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복음 전파를 해서 새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 명령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 돈에 팔여와서 몸을 하는 사람들, 압제에 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III. 맺는 말.
 
*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 본문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 본문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교훈들은 무엇입니까?
 
 
Number Title Reference
225 힘을 내십시오.
234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야고보서 4:14
23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7-37
232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21-28
231 노년기와 신앙생활 디도서 2:1-4
230 살았으나 죽은 교회 요한 계시록 3:1-6
229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6:21-28
228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영적 책임 신명기 65:1-9
227 에벤에셀 사무엘 상 7:2-14
22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5-15
225 주님의 부활, 우리의 변화 요한복음 20:19-23
224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3) 에베소서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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