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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경직 목사님 추모의 글
목사님을 추모하여 S.F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
고 한 경직 목사님께서 소천하셨을 때, 샌프란시스코판 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한 목사님!
저는 1963년 5월 2번째 주일 목사님께서 설교해 주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성가대의 특순자가 불렀던 찬송(373장) “세상 모두 사랑없어 냉냉함을 아는냐”로 시작되는 찬송은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때마다 부르기도 했고, 즐겨 들어 왔습니다. 이 찬송을 들으면서 교회 사무실에서 부활 주일 설교를 정리하고 있는데, 오레곤 주에 사는 옛 교우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고국 시간으로 수요일 오후 1시 15분에 소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전화를 받고나서 엉엉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저의 생명의 은인이시오,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 주신 어른이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딛은 후 절망의 나날을 보낸지 1년이 넘는 때였습니다. 시집오신 형수님의 권유로 영락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간 주일에 목사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저의 차디찬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주님이 사랑하는 가치있는 사람이요, 주님을 믿으면 밝은 미래가 있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의 죄와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회개했습니다. 저의 일생을 주님께 드려 나도 보람된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교회에 등록을 하러 교육관 1층에 갔을 때 목사님은 저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 오늘이 청년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네.” 목사님! 그날이 정말로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 초기에 갖는 신앙적 갈등 때문에 목사님께 편지를 올렸을 때에도 목사님은 친히 답장을 주셔서 저의 믿음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목사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군대에 다녀온 후, 대학 교육과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 설교가요 교육가이셨기 때문에만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셨습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되도록 최선의 삶으로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리시고자 힘쓰시는 모습이 정말 닮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을 뵈올 때마다 저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누리시며 사시는 모습을 보았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시고자 애쓰시는 목자의 심정도 보았습니다. 말 못하는 농아들을 위해서 농아부를 시작하셨고 한국 최초의 농아 교회를 일구셨습니다. 교회당 여러 곳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모금함을 설치해 두셨습니다. 영락 보린원, 경로원, 모자원을 통해서 사랑의 실천을 하셨고, 성도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목사님은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은퇴하실 때 목사님이 일구신 사역들을 장로님이 발표하시자 답사를 하시면서 “지금 하신 말씀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고, 여러분이 하셨는데 제가 이름을 빌린 것 뿐입니다.” 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개 교회주의를 넘어서 민족 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오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청렴 결백한 인생을 사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집 한 채, 저금통장 하나도 갖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풍요로운 삶, 나누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 청년들이 농촌 선교를 나가고자 모금할 때에 교우들이 다 집으로 간 후 조용히 다가 오셔서 후원금을 주시면서 “수고하십시오.”라고 웃으시며 손을 잡고 격려해 주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목사님은 주일 새벽 7시 1부 예배 후에 교회 계단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서 계시면서 8시 30분에 시작되는 교회 학교에 오는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손을 흔드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추운 겨울 그 흔한 가죽 장갑도 아닌 털실로 뜬 장갑을 끼시고, 아주 오래되어 흐늘흐늘해진 외투를 입으신 목사님을 뵈면서 그리스도인의 청빈과 교육의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은퇴하시기 전에 청년들이 목사님을 모시고 간담회를 했을 때 일을 기억납니다. “목사님의 사역에서 아쉬운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회원의 질문을 받으시고, 잠시 생각하신 후에 “나의 목회에 너무 분주하다 보니 개인 전도와 양육을 많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은 저의 목회 사역에 길을 안내해 주신 귀한 말씀이셨습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메는 목자의 심정, 즉 예수님의 사역방법과 목표를 가지신 목사님을 가깝게 뵐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요.

목사님, 지금도 저의 가방에는 ‘영락교회 평신도 지도 방향과 원칙’이라는 목사님께서 평신도 지도자 훈련에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분명한 비젼을 성도들에게 제시하셨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한 영혼이 변하고, 그들이 복음적인 생활을 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며, 민족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강의의 중요 내용은, 복음주의 신앙노선(성경 중심), 경건 생활의 연습(절제, 근엄한 청교도적 생활 윤리), 교회 연합 운동에 협력(에큐메니칼정신), 사회 정의의 구현(교회의 사회적 양심의 사명)이었습니다. 색이 바래서 노랗게 된 종이에 남아있는 말씀들은 지금도 저를 깨우치며 채찍질하시는 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목사님은 제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선포에 대한 열정과 가르치심과 청렴하신 생활은 제가 따르고 싶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중요성도 일깨워 주셨습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처럼 달려갈 길을 인내하며 힘차게 다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목사님처럼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자로서 사역하기를 바랍니다. 비젼을 제시하는 사역자로, 청빈한 삶을 사신 목사님의 발걸음을 이어가는 종이 되어 충성된 일꾼으로 사역하다가 천국에서 만나 뵈옵기를 소원합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품안에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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