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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영락교회 청년 복음화 운동에 대하여
박소인 교수님께 보낸 서신
변화 많은 날씨에 건강하신지요?:
 
교수님이 보내주신 영락교회에 대한 글을 읽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다가, 전에 영락교회 청년 신앙 부흥 운동의 시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970년대의 한국 정치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잦은 계엄령 선포, 반 정부 학생 청년, 노동자들의 운동등 소용돌이 속에서 영락교회 청년들도 방항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약 1년간 청년회가 해산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더 나아가서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현실 정치에 너무 민감하게 대항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청년 성경반에도 임원들이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성경공부해야 뭐하느냐는 식이었습니다.
그 때에 제 기억으로는 1973년도 고등부 반사이면서, 청년회 봉사부장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봉사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청년 성경반을 꼭 지키고 싶어서 저는 끝까지 남아서 배사라 선교사님에게서 요한 복음을 배웠습니다. 정말로 은혜의 강물을 경험한 귀한 영적 성장의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교회로서는 청년회가 있어야 하겠기에, 지금은 작고하셨을 것으로 아는 고환규 (당시, 기독공보사 편집국장. 후에 목사님이 되셨음) 형님이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제가 부회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쳥년회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임무는 다시 청년회를 만들고 물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에 처한 청년들 가운데, 수요 예배가 끝난 후 교회 2층(발토니)에 올라가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예배후에 즉시 문을 잠그지는 않으실 때이며, 사찰 집사님을 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청년 성경반에 나오시는 형제 자매님들이었는데 기억으로는 4-5명 정도였습니다. 국가와 교회 청년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간절한 기도회였습니다.
그렇게 약 2년 정도를 했을 때에, 제가 영락교회 청년 1부 성경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청년부 성경공부를 지도하시던 배사라 선교사님을 청년 몇 사람과 함께 힘껐 도와서 팀 웍을 이루워 그 반이 매우 건강하게 성장 했음을 기뻐하신 선교사님께서 사임하시면서, "이 선생,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 선생을 부르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도 지금처럼 충성된 일꾼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라고 하시면서 떠나셨습니다.
그러니까, 배 선교사님이 한경직 목사님께 저를 천거하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 당시 삼십 세를 조금 넘어선 나로서는 매우 당황해서 평신도부에 가서 할 수 없다고 두어 번 말씀드렸습니다. 정상적인 신학 공부도 하지 않은 저 같은 평신도를 성경반 강사로 임명하신 것에 대하여 내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 평신도 부장님은 오기형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때마다 격려하시면서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청년 성경반 강사님들은 연세대 민경배 교수님, 김형석 교수님, 장신대 배재민 교수님 같은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제 반에 누가 오겠습니까?
첫 주에 교실에 들어갔더니, 부장, 부감님 외에 여자 대학생 한 명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2년이 될 때에는 크게 성장해서, 교육관 교실이 부족해서 선교관에 새로 만든 당회실(그당시에 가장 좋은 방)으로 옮겼습니다. 새로 온 분들을 심방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구원의 확신과 신앙 성장의 과정들을 주간 중에 시간을 내서 개인으로 또는 그릅으로 양육했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쳐 말씀 묵상을 일상화 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청년 1반이 아주 큰 반이 되었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반에는 아직도 제가 섬겼을 때에 있던 분들이 협력자로 남아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만은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암담한 고국의 현실 속에서 주님의 복음의 빛을 비추고자 헌신된 청년들의 운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발전하게 된 것은, 이성재 목사님이 평신도 지도 목사님이실 때인데. 청년부 임원회 신년 수련회를 갖고자 했지만 강사를 찾지 못해서 시행이 힘들었습니다. 청년들이 강사를 찾지 못하자, 이성재 목사님이 청년부 임원들에게 저(이흥구)를 강사로 해서 겨울 임원 수련회를 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청년들이 마음에 내킬 이유가 없었지만(그 때에 청년회장님이신 신 집사님이 나와 동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안할 수는 없기에, 저를 강사로 해서 수련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주 간단한 수례바퀴 생활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교회에서 저녁시간을 이요해서  했는데 1974년이기 때문에 유류 파동으로 난방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임원들의 겸손하게 협력해 주셔서 정말로 은혜 가운데서 수련회를 은혜 가운데서 마쳤습니다. 
 
수련회 평가회 시간에 임원들이 한 사람씩 이야기 하는데, 이 수련회를 다시하되 자기들의 사람들을 다시 모으겠다고들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차가운 방에서 임원들이 모은 30여 명과 함께 똑같은 수련회를 또 했습니다(그룹 토의는 임원들에게 맡겼습니다). 성령님의 감화를 함께 수련회를 한 분들이 이 수련회를 영락교회 청년 전체 수련회로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교회 마당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등록을 받은 결과 약 300여명이 수련회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놀라운 역사를 축하하시기 위하여 주선애 권사님과 
 
한 목사님의 사위이신 이영헌 목사님(두 분이 장신대 교수이셨음)도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교수님이 독일 유햑을 떠나시기 전에 참석하셨던 청년 요일별 모임은 그 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계속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해 주간 중에 월,화, 목, 금요 모임으로 나누어서 모일 때였습니다. 
 
또한 모인 청년들이 회비를 내서 극동 방송에 '영락 청년의 시간'을 사서 북한에 있는 동포들에게 방송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세계 선교 기금 모금을 위한 바자회를 해서 제가 1976년에 그 때 돈 8천 만원(지금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유명한 액자인 '청년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그 때에 제가 목사님께 직점 글을 받아서 청년 자매님들에게 주어 비단에 수를 놓아 2개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2 개를 3천만원에 사셔서 하나는 본인이 가지시고  하나는 교회 도서관에 기증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써주신 글씨의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청년들이 '민족 복음화를 위한 영락청년의 운동'을 시작하여 여름마다 시골, 산골, 어촌을 찾아 복음을 전파하고, 여름 성경학교며, 자역 봉사를 했습니다. 박순태, 조성남, 하혜경, 지동춘, 정하진....... 많은 분들이 그 때에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셨던 분들입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께 이렇게 장황하게 쓴 이유가 있습니다. 어두울 때일수록 주님께 소망을 두고 함께 기도하는 동지들이 모여야 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주님의 일꾼들을 키워워 힘을 모으면,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격려의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실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수님! 힘을 내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주 안에서
 
이흥구 올림
 
Number Title Reference
64 코디 리(Kodi Lee) (당신이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63 Memorial Day
62 ​꼭 두 사람만. 아름다운 관계를 기다리며
61 '70년대 영락교회 청년 복음화 운동에 대하여 박소인 교수님께 보낸 서신
60 고 민하식 장로님을 추모하면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장로님을 추모함.
59 고 권길상 장로님을 추모하면서. 내 인생에 하나님의 손길이 되셨던 장로님을 추모함
53 믿음에 대하여 요한복음 10:10
52 왜 예수님을 믿는가? 요한복음 11:25,26
51 사랑에 대하여 누가복음 15:20
50 여호와를 기다리라. 시편 27:14
49 순례자와 방랑자 창세기 12장 1절
48 허무를 넘는 용기 전도서 1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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