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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창환 학장님을 추모하며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가운데 주님께로 가신 박창환 학장님.
 
고 박창환 학장님께서 아직 건강하시던 90대 초반에 쓰신 회고록의 제목을 ‘하나님이 넘치는 축복 속에 걸어온 나의 삶’ 이라고 붙이셨다. 학장님께서 친히 붙이신 회고록의 제목을 보며, 정말로 하나님이 주님의 품에 안기신 과정도 참으로 .넘치는 축복의 임종‘이셨음에 감사한다.
 
학장님은 부친 박경구 목사님과 어머니 김몽애 사모님이 이루신 가정에서 장남으로 나셨다. 박 학장님의 고향은 이북 황해도 황주군 천주면 외하리 신동에 사셨던 외할아버지 집에서 1924년 3월 19일에 출생하셨다.
 
내가 학장님을 1965년 서울 영락교회에서 처음 뵈었다. 1963년 5월부터 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 성서반에 들어가서 성경을 배워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마침 1965년 봄에 제1기 교사 양성부를 모집하기에 지원하여 주일학교 교사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 그 때에 신약 개론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장신대 교수로 계셨던 박창환 목사님이셨다. 신약과 구약, 학생에 대한 이해, 교회사 개론 그리고 어떻게 학생들에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 구사법 등의 과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1기에 들어갔지만, 군 입대로 인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고 군 제대 이후 1969년에 다시 양성부에 들어가서 제7기로 졸업을 하였다. 학장님께서는 그 때에도 신약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까 햇수로는 55여 년 전부에 학장님을 처음 뵌 것이다.
 
교사 양성부를 끝내고 나서 나는 주일학교 고등부 반사로서 봉사하였다. 그 후에 새로 시작한 청년 성서 1반의 성경 강사가 되어 2년을 섬겼다. 성서반이 많이 부흥되어서 나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신 교회 평신도 부에서는 박 학장님을 청년 1부 강사로 세우시고 나는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돕는 부감이 되어 청년 1부를 2년간 더 섬겼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잘 강해해 주셔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후에 내가 장신 대 신대원에 입학해서 학장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신약학과 헬라어였다. 헬라어를 독학하여 깨우치셨다는 학장님의 탁월하신 실력과 교수법 그리고 열정에 대하여 크게 감동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 학년 여름 방학 때에, 특별한 크라스를 개설하셔서 자원하는 학생들이 참여하여 무료로 듣도록 하셨다. 그것은 한 주간 동안 하루에 약 2 시간 씩,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풀어서 설명하시면서 강해하시는 것이었다. 뜨거운 여름 뜨거운 A.C도 없는 교실에서 땀을 흘리시면서 가르쳐주셨다.
 
당시에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집 2층에 방 하나를 얻어서 4 식구가 살았다. 아들 삼열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마침 장신대 부설 유치원이 있었는데, 등록금이며 기타 안내를 받기 위하여 문의하였다. 그 당시 원장님으로는 박 장님의 사모님이신 현수삼 권사님께서 맡고 계셨다. 권사님은 신학생들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계셨다. 아주 저렴한
수업료를 받겠으니 보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삼열이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유치원 교육을 받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 삼열이가 만 48세가 되어 4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참으로 오래 전 일이다. 가장 중요한 유년기를 잘 삼열이가 잘 보내게 된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요, 학장님과 사모님이 도와주신 은혜임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에, 학장님의 기도를 받기 위하여 찾아갔었다. 그 후에 나는 이민 생활에 적응을 하느라고 힘들고,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체를 조직해서 전도하면 양육하고 섬기는 일에 힘쓰면서 학장님의 소식을 간간히 접했다. 학장님의 임기를 마치시고 나서, 소련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를 섬기시고, 중남미에 있는 니카라과에 신학교를 섬기시기도 하시며, 목회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기관을 개설하신 일들에 대하여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연락드리면서 소식을 나누지 못했다.
 
2006년 내가 동부 뉴저지에서 산호세로 이사 와서 아는 목사님과 이야기 하다가, 박 학장님께서 미국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여 목사님과 다시 연락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지난 달(2020년11월) 4일까지 전화로 또는 이 메일로 인사도 드리고 보내 주시는 소식도 받았다. 약 8년 전에 이곳 북 가주를 방문하셨을 때에 우리 부부가 만나 뵙고 식사를 대접한 일도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팔십 후반이셨기 때문에 아주 건강하셨다. 지난 몇 년 간은 장신 대에 가셔서 94세가 되셨을 때까지 친히 학생들을 가르치신 어르신이셨다.
 
2013년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나의 내가 1980년도부터 써온 시들을 모아 ‘주여! 나의의 생명을’ 이라는 제목의 찬송 시 제1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박 학장님에게 추천사를 부탁하였다. 부족한 나의 글을 읽으시고 추천의 글을 써 주실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222 수의 찬송 시를 복사해서 박 학장님께 우편으로 보냈다. 놀라운 것은 며칠 후에 학장님께서 이 메일로 추천사를 보내 주셨다. 추천사를 보내시면서, “내가 이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시를 다 읽고 나서, 즉시 추천사를 기쁜 마음으로 써서 보내게 되었다.“ 는 글로 시작하셨다. 90세가 되신 연세에 우편물을 받으시자 마자 다 읽으시고, 추천사를 내일로 미루지 아니하시고 격려와 축하를 담은 귀한 추천사를 쓰신 분이셨다. 박 학장님이 제자를 참으로 아끼시는 분이시며, 촌음을 아끼셔서 하실 일은 미루지 않으시고 하시는 분이심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본 받기로 결심하도록 하신 어르신이시다. 나의 일생에 이런 귀한 학장님을 만나서 배울 수 있고 본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삶의 본을 보이신 고 박창환 학장님께 감사한다.
 
박 학장님은 신약성경 새 번역 전문위원으로 위촉받으셔서 주도적으로 번역에 참석하셨고, 공동 새 번역 성경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셨다. 청년의 나이에 장신대 교수로 임직하시기 시작하셔서 은퇴까지 섬기셨고, 그 후에도 가르쳐 제자 삼는 일을 평생 하셨다. 아드님이 사역하시는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에 있는 교회에서 그 도시에 사는 교인들을 위하여 평신도 신학원을 개설하셔서(2년 코스) 친히 1 년간 가르치셨다. 그러나 2020년에는 COVID-19로 인하여 제2년 차 수업을 중지하심에 대하여 매우 아쉬워 하셨다.
 
박 학장님께서 신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시다가 가끔 정색을 하시면서, “나는 배움이 적어 여러분을 가르치기에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서 저와 같은 부족한 사람이 있는 자리에 오셔야 합니다.” 라는 참으로 겸손하신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박 학장님의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 ‘자기 평가’라는 부분이 있다.
 
“나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따라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는 위선자였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나는 학문을 주장하고 장려하는데 남보다 뒤지지 않지만, 참으로
학문을 할 만한 재간도 능력도 없어서, 하는 척만 한 것이, 나라고 나는 자평한다.“
 
라고 쓰셨다. 그러나 박 학장님은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서 100주년 기념 신학자로 인정되어 상을 받으셨고 2012년에는 한국 기독교 학술원 학술상도 받으셨다. 참으로 늘 본받아야할 겸손하신 스승이요, 멘토의 모습을 지니신 어르신이셨다.
 
금년 여름부터는 전화를 드리면 잘 듣지 못하셔서 주로 이 메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씩 안부를 여쭈었다. 그 때마다 즉시 답신을 주시며 늘 기억하고 연락들 주어 감사하다는 글을 보내셨다. 11월 초에, 아드님이신 박선진 목사님의 따님이 중국에 살다가 미국에 들어와서 잠시 목사님 댁에 머물다가 버지니아로 떠나는 따님과 함께 가셔서, 한 주일간 다녀오시게 되었다. 아드님 대신에 박창환 학장님께서 주일 설교를 하시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제게 설교 원고를 보내셨다. 그 내용 가운데 손녀딸을 보내면서 “천국에서 만나자!” 라고 작별 인사를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손녀딸이 11월 28일에 가진 추모식에 와서 울면서 할아버지를 회상하는 순서를 맡았다.
 
내가 11월 4일 박창환 학장님께 안부 이 메일을 보냈다. 그 날 답장을 보내셨는데, 보내주신 글을 읽고 무언가 지나가는 예감이 있었다. 학장님은 내가 이제 정신이 맑지 않다고 하셨고, 이제는 컴퓨터 글자 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내게 답장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학장님께서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시고는 마지막에 -친구 박창환- 이라는 글로 마치셨다. 나는 매우 놀랐다. 왜 별 볼일 없는 제자에게 ‘친구‘라는 과분한 호칭을 주신 것일까? 물론 늘 겸손하셨던 학장님께 마지막 까지 낮추시는 분이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늘나라에서는 한 믿음의 동역자로 만나 보실 것을 예견하기도 하신 것 같았다.
 
나는 예감이 이상해서 아드님이신 박선진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연세가 드셔서 전과 같지는 않으시지만 잘 계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박 학장님은 11월 10일 아드님과 함께 교회를 다녀오신 후에 아드님께 내가 주님께 가야하겠으니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하신 후에 침실로 가셔서 누우셨다고 한다. 박 학장님의 말씀을 들은 아드님은 특별한 병환이 있으신 것이 아니므로 병원에 모시면 오히려 고생을 하실 것 같아서 다른 방법으로 임종을 준비하셨다. 쇼시얼 워커와 호스피스에 연결하여 박 학장님의 상태와 의료 기록을 하여 임종을 준비하셨다. 11월 14일 아침에 박 학장님의 침대 밑에서 매트리스를 펴고 누어있던 박선진 목사님께서 아버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박 학장님 곁으로 가서 뵈니 곧 운명하셨다. 그 때가 2020년 11월 14일(토) 오전 9시 23 분이었다. 정말로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속에서 소천’ 하신 것이다.
 
학장님께서 90세 되셨을 때에 ‘나의 아버지 천국에서 제일 먼저 뵙고 싶은 분’ 이라는 글을 쓰셨는데, 아버님 박경구 목사님은 이북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과 숭실대학과 평양 신학교를 같이 다니셨다. 변절자 강양욱 목사는 한 때 고 박창환 학장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이기도 하였다. 그가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어 친구인 박창환 학장님의 아버님을 회유하고자 하였지만,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꺾을 길이 없자,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에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하여 위기를 느낀 공산당원들은 감옥에서 박경구 목사님을 끌어내서 “이 놈은 총알이 아까워서 총으로 쏴 죽일 수는 없다.” 라고 하면서 박경구 목사님의 손발을 난도질하여 토막을 내었고 기관총으로 집단 사살한 사람의 시체들과 함께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이 소식은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1.4 후퇴 때에 남하하여 박창환 학장님께 전해준 이야기이다.
 
학장님은 아버지를 뵙고 싶은 간절한 글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나의 나이 90세, 무던히 오래 산 셈이다. 아내를 먼저 하늘로 보낸 지도 벌써 만 6년이
되어 간다. 이 땅에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거의 후회 없이 다 했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더 있어야 할 의무감도 없고, 더 살고 싶은 애착도 없다. 세상에는 나를 반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본다. 날마다 특히 밤마다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은 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하늘나라고 데려가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이다. 우선 내 부모님과 북한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앞서 간 나의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성삼위 하나님을 뵙는 기쁨과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이론적
기대가 물론 있고,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뵙는 기쁨이 클 것이라는 희망이 없지 않지만,
나의 감정은 누구보다도 나의 가족을 보고 싶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기대를 걸고 오매불망 보고 싶어 하시다가 뜻을 못 이루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고인이 되신 박창환 학장님은 지금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부모 형제들을 만나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부르고 계시리라!
 

 
(2020 12월 4일)
 
Number Title Reference
76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탄절 풍경
75 고 박창환 학장님을 추모하며
74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예배 진행
73 네이튼 헤일(Nathan Hale /1755.6,6-1776.9.22)
72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국 독립 기념일’ 풍경
71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4)
70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3)
69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2)
68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1).
67 “젊은 선교회와의 만남”
66 이상한 올킷 꽃
65 하나님의 은혜 (The grac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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