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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교회와의 만남”
“젊은 선교회와의 만남”
 
약 두 주 전에 나와 함께 고국 ‘젊은 선교회’를 섬겼던 후배 목사님께서 반가운 이 메일을 받았다.
 
매우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이신 목사님이신데, 보내주신 이 메일에는 다소 들떠있는 기분이 드는 분위기의 글을 대하게 되었다.
 
“목사님 제가 국민일보 2019년 5월 24일자 기사를 읽었습니다. 젊은 선교회 출신 형제로부터 꼭 찾아서 읽으라고 하여서, 그 신문 기사를 찾아서 읽었습니다. 목사님 그 기사에 우리들의 젊은 시절에 주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정말로 순수하게 모였던, 모임에 잠시 참석하셨던 이재서 형제님에 대한(현재 총신대 총장)글이 있습니다. 짧은 3개월 정도밖에 참석하지 못하셨던, 그 분이 모임을 통하여 매우 큰 영향을 받아서 ‘밀알 선교단’을 시작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는 기사입니다. 제가 컴퓨터가 서툴러서 기사 전문을 내드리지 못하니, 인터넷으로 들어가셔서 꼭 찾아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글을 받아 읽었다.
 
1978년 늦 가을에, 상도동에 주택가에 있었던, 세계 연합 선교회 사택 겸 사무실로 쓰던 건물이 얼마간 비어 있어서, 한국 성서 유니온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 성서유니온 설립 초창기에 윤종하 총무님을 모시고 간사로 일하면서 쌓은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단체를 사임한 후이지만 총무님께서 가서 젊은 선교회 설립에 대하여 말씀드린 후에, 모일 장소가 없다는 사정을 말씀드리니 기쁘게 큰 리빙룸을 토요일 오후에 젊은 선교회 모임 장소로 쓸 수 있도로 허락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다니던 신학교가 그리 멀지 않은 거여동에서 전세를 들어 살 때였다.
내가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모임 장소를 버스를 갈아타면서 오갔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신학교 공부를 하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을 모아서, 말씀 증거 준비와 그릅 성경공부 교재 만들기, 모임 운영 계획 수립, 그릅 리더 훈련 그리고 모임 소식지인 ‘안과 밖’ 편집등을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이 일을 도와 주신 분은 신학교 같은 반에서 선교에 뜻을 두셨던 두 분이었다. 한 분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맥시코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셨고, 다른 한 분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도미하셔서 아메리칸 인디안 선교와 한인 교회목회를 하신 목사님이시다.
 
설립 후 몇 개월간 그 장소를 사용할 때에, 선교사님들이 계실 때에는 보일러로 난방을 하였지만, 우리들이 사용할 때에는 기름 보일러를 작동하는 방법도 모르고 기름 탱크가 있는 차가 와서 대량으로 기름을 공급하는 보일러라 기름 값을 댈 길도 없어서 19공탄 난로 하나로 추운 겨울 모임을 가졌다. 그런 환경에서30여명의 청년들이 제 1 회 ‘젊은 선교회 겨울 수련회’를 3박 4일간 가졌다.
 
한 편, 그 건물 뒷쪽 작은 방에는 앞을 못보시는 청년이 기거하셨다. 윤종하 총무님이 잘 아시는 분의 부탁으로 그 곳에 기거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으신 분이다. 그 분도 방에 연탄 난로를 놓고 추운 겨을 나시면서, 힘들게 그 방에서 숙식을 하셨다.
 
우리들이 그 분을 찾아가서 인사도 나누고,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자, 자기도 참석하고 싶다고 하셨다. 비록 앞은 못 보셨지만 듣는 것을 하실 수 있으므로 기꺼이 허락 하였고, 그 후에 열심히 참석하셨다. 그후 1979년 봄이 되어 우리 모임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교회 건물로 옮겼다. 모임의 참가 인원이 더 이상 그 방에서는 할 수 가 없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 번에도 윤종하 총무님이 출석하시는 교회를 소개해 주셔서 넓은 공간에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선교회의 시작과 성장에 있어서 윤종하 총무님의 협력과 배려가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이재서 총장님께서 ‘밀알 세게 선교회’를 설립하시게 된 계기에 대하여 국민 일보에 계재하신 글을 직접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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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대학생 성경공부 모임서 선교단체 구상
<3> ‘젊은 선교회’와의 만남
입력2019-05-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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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가 1980년 3월 시각장애인 재활시설인 서울 대린원에서 토요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연합세계선교회 사택에서 지낸 두 달 반 동안 얻은 것이 참 많았다.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더 많았다. 그 집 거실은 상당히 넓어서 토요일마다 ‘젊은 선교회’라는 대학생 선교 단체가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한집에 살고 있던 덕분에 나도 그 모임에 가끔 참석했다. 나로서는 대학생들의 성경공부 모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기회였다. 당시 남들에겐 흔하디흔한 모임 중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내겐 분명 특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임은 1년 뒤에 밀알을 조직해 내가 대학생과 청년들을 리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성경공부 모임에서 그룹을 나눠 정해진 교재를 갖고 성경을 공부하는 걸 경험했고, 그룹 리더들을 지도자가 미리 만나 예비 교육을 시키는 것이 성경공부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다. 젊은 선교회에서는 매월 소식지를 발간했는데 이 또한 여러 가지를 배우게 했다. 회원들을 한마음으로 묶어주고 정체성을 갖게 하며 구성원들로 하여금 같은 목표와 정신을 공유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현재 하는 일과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주변에 알려 관심과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홍보매체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그 소식지를 통해 매월 재정의 수입과 지출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밀알이 공신력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월별 재정보고의 힌트를 바로 거기서 얻었다.

사실 젊은 선교회를 경험하기 전까지 나는 선교단체나 기관을 경험해 본 적도, 활동을 구경해 본 적도 없었다. 그마저도 짧은 기간의 경험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무엇이든지 보는 대로 빨아들이고 마음에 간직했다. 아마 ‘언젠가는 나도 선교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이 모든 것들을 예사로 넘기지 않게 했던 것 같다. 성경공부 교재, 회지 발간, 재정 공개, 모이는 방법 등 선교회를 통해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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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서 총재(앞줄 가운데)가 1980년 5월 한국밀알선교단 회원들과 장애인 인식개선 운동을 펼치는 모습. 세계밀알연합 제공

소중한 인연들

미국 남가주 밀알의 시작과 발전 과정에 많은 역할을 감당했던 이미영 사모도 거기서 만났다. 젊은 선교회의 핵심 회원이었던 그는 당시 대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내가 그 뒷방으로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은 1978년 12월 31일 오후. 그는 회원 몇 사람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아마 추운 뒷방에서 앞도 못 보는 사람이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연말도 되고 하니 위로 차 찾아왔던 것 같다.

그 뒤로 그는 봉사자가 돼 상당히 많은 책을 내게 읽어 줬다. 두꺼운 대학 교재도 여러 권 녹음해 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움이 됐다. 그 후엔 미국으로 가서 살면서 LA밀알이 설립되고 발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아들 정파가 벌써 커서 LA밀알의 단원이 돼 토요일마다 장애아동을 돕는 봉사자가 됐으니 그 시절 그와의 만남도 참으로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 집을 사무실로 쓰는 성서유니온의 윤종하 총무와 자주 만나 개인적인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유익했다. 그 큰 집에 혼자 지내면서 밤마다 거실 바닥에 꿇어앉아 정말 열심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개인적인 기도도 많았지만, 장애인 선교를 향한 기도는 더욱 뜨거웠고 절실했다. 꿇어앉아 장애인 선교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불과 10개월 후에 하나님께서 밀알선교단을 설립하게 하셨다. 그때는 그것을 상상도 못했다.

그 시절 그 편지

그 무렵 내가 어떤 분에게 썼던 편지 한 통엔 놀랄만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밀알이 시작되기 8개월 전인 1979년 2월 22일에 그 집에서 쓴 편지다.

‘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저는 이 땅의 그늘진 곳을 위해 선교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100만 장애인이 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집안 수치라고 골방에 숨겨진 채 벌레처럼 살아가는 그들! 혹은 멸시와 천대 속에 거리를 방황하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그들! 그들의 영혼을 향해서도 복음은 증거돼야 합니다. 몇 푼의 구제금으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어디에도 마음에 드는 사람만, 멋진 사람만, 고상한 사람만, 친한 사람만, 지식인만, 깨끗한 사람만 복음 전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한국교회를 향해 말할 수 있습니다. 호화롭고 아름다운 교회에 비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습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으며, 어떻게 그들을 돕고,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니까. 그렇다면 그 분야에 대해 잘 알아서 사명을 갖고 일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는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내 이웃인 100만 장애자에게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에 대한 여러분의 협력을 저는 결코 무의미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엄청난 말들을 편지로 쓸 수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건방지고 도전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당시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마침내 그해 10월 밀알선교단을 시작하는 결실로 나타났다.
 
*****
 
 
젊은 선교회 모임이 이재서 박사님을 주님이 쓰시는 일에 미약하나마 작은 불씨가 된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 당시 모임 뒷 줄에 앉으셔서 열심히 경청하시던 박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당시 이재서 형제님이 상한 심정을 가지시고 눈물로 기도하시고 삶의 사명을 구체화 하시기 위하여 시각 장애인 선교에 앞장 서시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비록 그 후에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장애우를 위한 선교회를 시작하셨다는 소식은 들었다.
 
또한 감사함 것은, 이재서 박사님이 쓰신 바와 같이 젊은 선교회에 참석하셨던 분들의 사랑의 실천이다. 모임의 회원들이 책을 읽어 드리고, 방대한 분량의 책을 녹음을 해서 듣게 해드린 분들이 여럿 있다. 그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재서 박사님의 글에 나오는 김미영 학생(당시 대학 3학년)은 현재 내가 소속되어 있는 교단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목사님의 사모님이시다.
 
나의 젊은 시절, 아주 미숙한 기독 청년에 불과했지만, 주님의 지상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고자 설립한 ‘젊은 선교회’ 사역을 통하여 이재서 박사님의 사역에 자그마하지만 쓰임 받은 것을 무었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동역자님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주후 2019년 8월 19일)
Number Title Reference
76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탄절 풍경
75 고 박창환 학장님을 추모하며
74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예배 진행
73 네이튼 헤일(Nathan Hale /1755.6,6-1776.9.22)
72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국 독립 기념일’ 풍경
71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4)
70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3)
69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2)
68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1).
67 “젊은 선교회와의 만남”
66 이상한 올킷 꽃
65 하나님의 은혜 (The grac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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