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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차고 넘치는 교제
참고: 요한 1서 1:1-4
지난 주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이시간에는 성도들간의 뜻 깊은 교제에 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께서 하늘 문 넓히 여시고 은혜와 교훈을 풍성히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입성하심을 기억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 군중들이 호산나를 연호했어도, 옷을 벗어 깔았어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나무가지를 길에 깔았어도,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기대에 예수님이 맞추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즉시 독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즉시 로마의 경비대가 있던 안토니오 망대로 가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분개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열정과 환호가 있었어도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의 대상을 잘 알고 믿어야 합니다.

주후 3세기경까지 “예수는 누구신가?”에 대한 논쟁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한 파가 ‘가현론자’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삼위일체의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눈에 보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미 읽으신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진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전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이렇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전하는 한 가지 이유는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기” 이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귐은” 인간들끼리의 사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교제를 하지만 그 중심에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교제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3절에 ‘사귐’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본문에서 ‘사귐’이라는 말은 ‘교제’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주님과 교제하고 성도들간에 거룩한 사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들이 조금 전 외우신 사도 신경 가운데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늘 것”을 믿사오며 라고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이 기록된 원래 언어인 헬라 말로 교제를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로 참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글 개역 신약 성경에서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사귄다’ ‘동참한다’ ‘참여한다’ ‘함께 소유한다’ 라고 각기 문장의 흐름에 따라서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교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기초는 본인이 죄를 고백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교제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어느 지점에서 하신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 여러 곳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에 많은 지체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러므로 지체는 서로 연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동고동락합니다.

지체가 연결되고 동고동락함에 있어서 그 동력은 사랑입니다. 교제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바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함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말로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해야 신앙 동료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은 연약합니다. 자주 변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랑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주님의 사랑과 깊은 교제를 기억하고 지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1. 우리들은 성찬을 통하여 주님과 성도들과 교제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제정하신 예식은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교제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을 통하여 성도들은 주님의 찢기신 살을 기념하는 떡과 흘리신 보
혈을 기념하는 잔을 받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고난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성찬은 주님의 자녀들이 한 가족으로 하나 되어 교제의 자리에 있음을 말합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과 신앙의 고백을 통하여 교제합니다. 또한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을 머리로 하여 지체가 됨으로써 한 가족이 되었음을 믿고 교제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 성도들이 교제할 때 우리들의 교제가 가능하도록 한 가족으로 묶어주신 주님의 찢기심과 피 흘리심이 있었음을….. .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자중하는 때입니다. 온 교회가 서로 하나되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에 힘쓰는 신앙 연마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절기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경직 목사님께서 가끔 ‘가화 만사성’이라는 말을 바꾸셔서 ‘교화 만사성’이라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교회가 화목해야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한 가정과 같습니다. 가정은 세상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사랑이 있고 용납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도, 영적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도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개역성경에는 참여 한다.)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내 교만과 자만심도 죽고, 내 의지도 죽이는 것을 통하여 주님을 본 받받아 겸손해지고 공손해져야 진정한 성도간의 깊이 있는 교제의 장이 생깁니다. 이런 귀한 은혜가 우리 엘림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복음을 위한 사역을 통한 교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 후 때로는 2명씩 짝을 지어서 전도여행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에 대하여 마가복음 3장 13절 이하를 보면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 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예수님과 교제했습니다. 둘씩 짝지어 다님으로써 서로 교제했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말씀 전파 사역을 하면서 교제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제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예배 끝나고 나서 커피를 먹고, 밥 먹고, 어디 가서 노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삶을 사실 뿐만 아니라 전도여행도 다니시고, 고생도 함께 하시고, 기쁨도 함께 맛볼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깊이 있는 교제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1장 5절을 보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함을 인함이라.”고 빌립보 교회를 칭찬 하셨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면 깊이 있는 교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 하나님 말씀을 함께 배우고 연구하며 함께 기도하는 모임에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 함께 전도도 나가고, 봉사도 하고, 가르칠 수 있는 분들은 새 식구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 혹은 교회 밖에 나가서 함께 사회봉사도 하는 사역을 통한 교제가 필요합니다.

땀 흘리는 사역, 주님이 분부하신 지상 명령인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을 위한 자신의 헌신이 빠진 교제는 금세 의미를 상실합니다.

고린도 전서9장 23절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참여(또는 동참)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1963년 5월 한 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주님을 구체적으로 만났습니다. 예배 후에 등록처에 가서 등록할 때, 한 경직 목사님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면서 “청년, 청년의 삶에 오늘이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오.”라고 하시면서, “교회에 그냥 나오지만 말고 성경반에 가서 꼭 성경을 배우고 서료 교제해야 한다.”는 말씀은 내 삶에 바른 신앙의 방향을 설정해 주신 귀한 권면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순종했습니다. 저의 오늘이 있음에는 값진 신앙의 교제의 장이 있었습니다. 나를 이끌어 주시고 세례 받도록 권면 해 주시고, 경건의 시간을 갖도록 가르쳐 주시고 성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귀납적 방법으로 요한복음을 깊이 있게 가르쳐 주셨던, 청년 성서반 강사셨던 배사라 선교사님, 그리고 전도 훈련을 해주시고 노방 전도도 하며 사 영리를 가지고 공원에 다니면서 전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격려해 주신 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먹이고 함께 땀 흘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손잡고 기도하고 울고, 웃었던 동역자들의 얼굴을 지금도 생생합니다.

부족한 인간들이 모이면 모일 수록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하여 성령님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면 모이수록 그 열기가 뜨겁고 사랑이 진지해 집니다.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면 “성령의 교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2절을 보면,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힘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3절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해 드린 교회였습니다. 성도들간에 교제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옥에 갖혀 있는 사도 바울에게 그 교회에 불화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4장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 하시기를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3.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함을 통하여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의 지체들이라면, 교회의 필요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헌금만 내면 그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 즉 은사를 사용하여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교제합니다. 에베소서 4장 12 절의 말씀처럼 우리들이 받은 바 은사를 통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 4절을 보면 마게도니아에 있는 개척 교회들이 바울에게 부탁하기를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교회 유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고난 받는 다른 믿음의 가족들의 고통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한 가족 된 그들과의 교제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다라고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에는 “성도들이 주고 받는 일에 서로 참여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교제’는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육적으로 필요를 서로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냥 수박 겉핱기가 아닙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한숨을 듣는 섬세한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타까워 하는 긍휼의 마음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수고의 땀과 눈물이 배어나오는 교제일 때 값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간에 교제는 어떠합니까?

*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은 사람답게 주님을 머리로 하여 모인 지체로서의 가족입니까?
*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주님과 교제합니까?
* 우리는 복음을 위한 교제를 합니까?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만납니까”
* 땀을 흘리고 손에 손을 잡고 나갑니까?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낮아지고 서로 돌보며 섬김으로써 교제를 강화하는 교회입니까?

베드로 전서 5장 1절을 보면 “믿는 사람들을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장차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날을 준비하십니까? 주님과 영원히 성도들과 영원히 교제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동안 준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귐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사귐’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해서 4절의 말씀처럼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는” 엘림 장로교회가 되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67 두 문, 두 결과 참고: 마태복음 7:13-20
68 지혜를 얻는 첫걸음.(자녀 교육) 참고: 잠언 1:7-9.
69 무지개를 보신 하나님 참고: 창세기 9:1-17
70 건강한 일꾼, 건강한 교회 공동체 참고: 출애급기 18:13-23
71 기쁨이 차고 넘치는 교제 참고: 요한 1서 1:1-4
72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참고: 예레미야 20:18
73 사랑 때문에 감사해서 참고: 로마서 12장 1절
74 예수님을 닮으려면 참고: 마가복음 3:13-15
75 섬기러 오신 예수님 배우기 참고: 마태복음 10:41-45
76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하신 예수님 참고: 마가복음 1:35-39
77 성령에 매인 사람 참고: 사도행전 20장 17-24절
7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참고: 고린도 전서 1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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