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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믿을까?
참고: 히브리서 11:1-7
믿음의 대상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베드로 전서 3장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 마태 28:18-20절에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주신 말씀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아버지, 아들, 성령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일컬어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본체는 하나신데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삼위 일체 신관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 삼위일체의 깊은 뜻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인간의 이성 즉 생각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시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청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경험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언어와 사고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다 표현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수학에 우리가 계수할 수 없는 분야를 무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둘째로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하여도 그 사람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저는 결혼한 지 31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 아내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10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자기의 생각이 어떠하다고 말해주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간에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해 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성경과 우리들의 체험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계시하셨습니다. 3위 즉 3 인격자로 계십니다. 그런데 본체는 하나이십니다. 삼위 일체론을 잘못해석하면 이단이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바 대로 믿으면 좋겠습니다. 일체이신 한 분만 강조하면 일신론자가 됩니다. 만일에 세 인격만 강조하다 보면 삼신론에 빠집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자 이십니다. 성자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이십니다. 성려님은 인간을 성화시키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삼위가 일체로 역사하셨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증거 하실 때도 삼위가 일체로 역사하셨으며,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삼위가 함께 하셔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 인격이 한 본질이신 하나님 안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신적 인격은 영원히 서로 독립된 인격이지만 동시에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일치 속에서 하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니케아신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아다나시우스라는 분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부도 전능하시고 성자도 전능하시며 성령도 전능하시다.” 그러나 세 전능자가 아니라 한 전능자입니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시고 성자도 신이시며 성령도 신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주가 아니라 한 주이십니다.
그리고 이 삼위에 있어서 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의 선이나 후가 될 수 없으며 한 위가 다른 위보다 크거나 작을 수도 없습니다. 삼위로서의 전부가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같이 동등하심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삼위로서 일체와 일체로소 삼위가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는 이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와 같이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에는 하나라고 하더라도 아카드(연합된 하나 창세기 11:6)와 야시드(개별적 하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2 이상을 말합니다.

저는 먼저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암송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주기도문과 10계명과 사도신경일 것입니다. 왜 외웁니까? 신앙생활의 좌표와 행동의 기준을 형성하는 중요성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부분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십계명의 제 1조가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그러면 사도 신경에 첫 마디가 무엇으로 시작됩니까?”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외우는 이 말이 한갓 입술에서 맴도는 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외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상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9절을 보면 이 믿음도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선물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어떤 노력의 대가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 가운데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면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받으시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분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세를 점검하고 더욱 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거야 할 거룩함에 이르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4편 1절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도다”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도 많습니다. 소위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론자들도 있습니다. 또는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고 믿는 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달리 특별하게 소유한 세 가지 보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이성입니다. 둘째는 양심입니다. 셋째는 우리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견지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합니다. 연구도합니다. 그래서 발명도합니다. 창조적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전됩니다. 이성을 통한 활동입니다. 이런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대 우주를 바라보십시오. 해는 매일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집니다. 음력 초순에는 초생 달이 뜨고 보름에는 만월이 됩니다. 춘, 하, 추, 동이 있습니다. 푸르른 나뭇잎이 얼마 있으면 온갖 색의 단풍으로 물듭니다. 얼마 있으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러나 새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이 움돋습니다. 천문학자의 말을 듣지 않고도 이 대 우주는 질서와 고안과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길가에 가다가 회중시계를 주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바늘이 소리를 내면서 돌아갑니다. 하도 궁금해서 시계를 뜯어보았습니다. 바퀴들이 엇물려서 돌아갑니다.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이것을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시계와 같이 질서와 고안이 있는 것을 보면 이내 이것을 만든 분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닙니까? 이 우주를 보면 유성이 항성을 싸고 돌아갑니다.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은 권능이 많으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당 20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리라.” 시편 19편에 다윗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 내는도다.”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이런 우주를 만드신 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인간의 가슴 속에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꼭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의 말대로 인간에게는 도덕적 명령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을 후천적이라고 하면서 사회적 문화적 요인으로 또는 환경과 교양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다소 후천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양심은 근본적으로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그리스의 스토익 철학자 에픽스테투스는 “사람이 날 때 선천적으로 음악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가지고 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도덕적 의식은 다 가지고 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양심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내 속에는 도덕적 법이 있다.” 양심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양심을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법”이라고 합니다. 양심은 우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 게서 계시는 것을 압니다.

셋째는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영혼은 예배의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말하지만 종교적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동물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예배를 위하여 모였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고양이들이 모여서 철야 기도회를 가졌다고 하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은 그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야만인 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살집만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신전을 세웠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모유를 먹고자 하는 본능 있습니다. 왜요? 어머니의 모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녀가 사춘기가 되면 전에 없던 번민이 생깁니다. 이성을 그리워합니다. 왜요?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종교적 본능이 있는데, 이 종교적 본능에 대해서만 이것을 만족시킬만한 대상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곧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니까 인간에게 그런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영적 목마름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동물은 배불리 먹고 누워 자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주가 풍부해도 거기에서 영혼의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절대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영국에서 6만 파운드(미화로 약 10만 불) 연봉을 받는 분들은 부자 축에 든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행복한가를 물을 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내 영혼의 공백을 메울 분이 없다.”고 갈파한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에 다 만족을 느낀다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믿음이 생기기까지는 참 만족이 없고 마음 한 구석에는 허무감이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모릅니다.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풀라톤은 “무신론자는 영적 환자”라고 지적했습니다. 명적으로는 병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가령 매우 태양이 밝지만 눈 먼 소경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까? 믿지 못합니까? 영적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옳게 살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죄가 있지만 가장 큰 죄는 불신의 죄 즉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용서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로마서 1장 20, 21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을 정말로 압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합니까? 예배합니까? 경배합니까?

만일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게 됩니까?
로마서 1장 23절을 보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절대화하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온갖 우상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흙과 쇠붙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물질, 명예, 권력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ㅇ원히 거하느니라.”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밤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 오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해 주십니다. 그 결과 인생의 어떤 위기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염려와 근심 걱정을 돌파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생명이 다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의미와 삶의 바른 태도와 삶의 미래가 보장되어 살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사람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시고 가장 보람된 인생을 살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승리적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멀리 떠난 분은 안계십니까?
자신의 마음대로 허랑방탕하며 산분은 안계십니까?
돼지가 먹는 음식도 못 먹을 만큼 영적으로 굶주린 분은 안게십니까?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께로 나오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최대의 기쁨입니다. 어떻게 만나는 가는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51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히 참고: 역대하 5:1-14
52 바람직한 사역자의 자세 참고: 사도행전 18:18-23
56 어머니의 믿음의 영향력 참고: 디모데 후서 1:3-5
57 지혜의 유익 참고: 잠언 2:7-22
58 승리의 비결 참고: 여호수아 5:1-12
59 나를 생존케 하신 하나님. 참고: 여호수아 14장 6-15절
60 살았으나 죽은 교회 참고: 요한 계시록 3:1-6
62 누구를 믿을까? 참고: 히브리서 11:1-7
63 풍성한 삶의 비결 참고: 요한복음 7장 37-39절
64 피해야 할 세 가지 유혹 참고: 잠언 1:10-19
65 사도 바울의 간증 참고: 빌립보서 3:4-11
66 지혜의 근본 참고: 잠언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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