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
사도 바울의 간증
참고: 빌립보서 3:4-11
우리들에게 엠마오 기도원에서 수련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육신도, 마음도, 그리고 영혼도 강건해지시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실리콘 밸리 열린 문 교회도 건강한 교회로 성장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도하던 시대에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로마 시민권을 자랑했습니다. 학문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부와 명예도 자랑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외부의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 이하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전통인 할례가 구원의 조건에 빼놀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들마다 가서 분쟁을 일으키는 거짓 교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유대인임을 자랑했습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성서가 주시는 말씀을 더해서도 안되고 빼서도 안됩니다. 가령, 믿는 가정에서 났다던가, 예수 믿은 연륜이 길다든지, 성경을 많이 안다든지, 또는 어떤 교파나 교회에 속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방법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요사이는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뽑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 자신의 삶을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분명한 변화, 분명한 목적이 생겼습니다. 계속 성장했습니다.
자연적으로 그렇게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도 다른 사람들 처럼 자신을 자랑했고,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1.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습니다(4-7).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4가지 자랑이 있었습니다.

1)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2)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개종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은 선택받은 족속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3)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유대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지파였습니다. 야곱의 아들가운데 베냐민 만이 조상들이 약속한 땅에서 낫습니다. 이스라엘의 첫번 왕이 베냐민 지파에서 낫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남북 왕국이 갈릴 때 남 왕국 유다와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전투에 나갈 때마다 가장 용맹스런 지파였습니다. 호세아 5장 8절을 보면 “너희가 기브나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벧아웬에서 깨우쳐 소리하기를 베냐민아 네 enl를 쫓는다 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베냐민지파 사람들입니다.그의 피에는 용기와 총성과 순결이 배어있는 지파라는 것입니다.

4) 그는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부모들이나 조상들이 다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낫습니다. 즉 ‘디아스포라’입니다. 즉 본국을 떠 나서 외국에 흩어져서 사는 유대이었습니다. 우리도 외국에 와서 살지만 이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어떤 성경 해석학자는 이 말이 그의 혈통만이 아니라 히브리 인으로서 히브리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다 간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22장 2절을 보 면 그가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 히브리말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적 요소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배워감을 통해서 자신이 자랑할 만한 성취를 했습니다.

1)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원은 기원전 2세기의 ‘하시딤’ 운동에 기인합니다. 이스라엘이 헬라문화 화하는 것을 반대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하는 일에 생명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250가지 명령과 365가지 금령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두 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샤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학문과 종교적인 면에서 남이 부러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그는 교회를 열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잘못 인도한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은 물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원정을 갔습니다. 그의 열심은 산헤드린 공의회도 인정했습니다.

3)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관원처럼(눅 18:21) 말입니다. 이만하면 유대인으로서 자랑할 만 하지 않습니까?

7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좋은 조건들은 무엇이든지 다 버렸습니다. 왜버렸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을 바로 믿으려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랑, 교만, 전통들을 모두 다 청소해 버려야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왕 노릇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사도 바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 제자로 살기 위해서, 전파하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비웠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우리들도 이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힘썼습니다(8,9).

사도행전 26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또 다른 간증을 보면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율법의 의를 자랑하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논리적으로만 믿던 부활의 사건을 체험한 후부터 그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 그가 알던 율법적인 지식, 그런 생활을 버린 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그 위에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전진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버렸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습니다. 본문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이라는 부분을 실제로는 ‘나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하는 문법적으로 좋을 것입니다. 헬라 말에서 시제가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왜 그렇게 계속 비우면서 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통해서 알아 가는 지식이 너무 탁월해서 다른 지식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경을 깊이 공부해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역사의 원칙이 있습니다. 바른 생활의 원칙이 있습니다. 가정, 교회 사회와 국가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간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말씀을 주시며, 부활하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구도 줄 수 없는 귀한 지식을 얻고 있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을까요? 그 두번째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시거나 사람들이 볼 때 그의 영적 주소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는 율법적인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의는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믿는 믿음, 즉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얻은 의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는 단계를 넘어섰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는 성장하는 성도의 생활의 기쁨을 간증하는 우리들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나의 영적 주소가 예수 그리스도임이 확인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날 우리의 의로, 내 기준으로 산 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줄로 분명히 믿습니까?

3.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고자 했습니다(10-11).

10절 말씀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를 알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알려고 했습니까?

1)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살되 부활의 권능을 삶에서 경험함으로서 주님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2) 이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는 고 난에 동참함을 알기 원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고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 고 고린도 전서 15장 31에 말씀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 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 법칙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사도 바울 처럼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서 정말 자신이 죽습니까? 겨우 명맥이나 유지해서 구원이나 받으면 된다는 힘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일이 사실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들이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서 주님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했고, 양육도 했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보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 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그날이 경주의 마지막임을 알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두 주님을 만날 날 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에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바로 눈앞의 유익과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들이 이번 수련회에서 버릴 것을 다 버리셨습니까?
주님을 더욱 알아 가시고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갈구하십니까? 자신이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시기를 구하십니까? 언제 주님이 불러도 서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Number Title Reference
51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히 참고: 역대하 5:1-14
52 바람직한 사역자의 자세 참고: 사도행전 18:18-23
56 어머니의 믿음의 영향력 참고: 디모데 후서 1:3-5
57 지혜의 유익 참고: 잠언 2:7-22
58 승리의 비결 참고: 여호수아 5:1-12
59 나를 생존케 하신 하나님. 참고: 여호수아 14장 6-15절
60 살았으나 죽은 교회 참고: 요한 계시록 3:1-6
62 누구를 믿을까? 참고: 히브리서 11:1-7
63 풍성한 삶의 비결 참고: 요한복음 7장 37-39절
64 피해야 할 세 가지 유혹 참고: 잠언 1:10-19
65 사도 바울의 간증 참고: 빌립보서 3:4-11
66 지혜의 근본 참고: 잠언 1:1-7
Page: (6/19), Total: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