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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FA
영국으로 발령이 나서 근무하러 간 아들을 기억하며
USAFA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런닝 셔스의 앞에는 짙은 남색으로 쓴 가로 2.5 센티미터에 높이 3.3 센티미더 그리고 글씨의 넓이는 7 미리미터로 반둣하고 선명하게 USAFA라고 왼쪽 편에 쓴 셔츠를 입고 있다.
 
1990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사관학교로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하여 공항에 나갔던 일이 어제 일처럼 눈 앞에 선명하게 펼져진다. 조금 긴 머리에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부모의 마음으로는) 아들 삼열이가 비행기 승강장으로 떠나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는 우리 부부의 마음은 무엇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학교이니 기쁘기도하지만, 강한 훈련으로 국가의 간성을 키우는 사관학교의 전 과정을 마치고 임관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삼열이가 운동을 두루 좋아해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저런 팀 스포츠도 했고, 중학교 때는 주짓수(유도를 변형한 호신술)를 고등학교에서는 태권도를 열심히 했지만, 키나 몸무게나 재능면에서 남보다 내놓을 만큼 월등한 것이 없었다.
 
17살의 호리호리한 몸으로 조그만 가방 하나를 가지고 집을 떠난 아들이, 날개를 달고 집을 떠난지 벌써 26년이 넘었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입학식을 하기 전에 있는 ‘오픈 하우스’모임에 갔었다. 약 천이백 명의 신입생의 부모들과 친지들이 모인 큰 강당에서 생도들이 하나씩 호명되어 나왔다. 우리 부부는 삼열이가 생전 해보지 않은 고생을 견디고 입학하게 된 것이 너무나 대견했다. 드디어 삼열이의 이름이 호명되어 나올 때에 “삼열아…!” 소리지르면서 안아주고자 뚸어갔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삼열이 바로 앞에 도착하자 우리에게 훈련중에 배운 경례를 깎둣이 한 후에, 흰 장갑을 낀 손을 쭉 뻣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정말 군이 같았다. 까맣고 단단해진 몸매와 얼굴을 보는 우리 부부는 아들을 참으로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악수 후에야 서로 얼싸 않고 기뻐할 수 있었는데, 엄마와 허그를 할 때에 보니 삼열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참으로 어린 나이에 힘든 훈련을 받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름 방학 때에도 이런 저런 훈련이 있어서 한 주나, 두 주 정도 집에 와서 쉬고 떠났지만, 어느덧 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관학교 풋볼 경기장에서 졸업식을 가졌는데, 온 생도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하여 온 하객들이 스타디움을 가득채웠다. 생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졸업장을 주고, 받은 후에는 축하객을 향해 경례를한 후에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식이 끝나면 생도들은 하나같이 함성을 지르면서 자기 모자를 하늘에 던진다. 그 위로는 공군 곡예 비행대가 굉음을 내벼 하늘을 가르고 갔다. 실로 장관이었다.
 
졸업식을 끝내고 모텔에 왔다. 삼열이가 사관학교 기숙사에서 자기가 쓰던 것들을 가지고 기숙사에서 나와 우리와 함께 모텔에 약 이틀 지낸 후에 비행훈련을 받으러 텍사스 임지로 떠났다. 삼열이가 떠나기 전에 자기가 입던 4학년 교복과 모자, 그리고 겨울철에 운동하고 나서 체온을 보존할 수 있도록 면으로 두껍게 만든 자켓과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여름 자켓을 주었다. 또한 아직 깨끗하니 아빠가 입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체육 시간에 입었던 런닝 셔스를 두 개를 주었다. 옷의 밑에는 자기 이름과 중대의 표시가 검은 글자로 쓰여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하니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행기 조종사 훈련을 받으러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졸업 전에 MCAT 시험을 본 것이 합격되었기 때문에 메릴란드에 있는 주로 사관생도 출신을 의사로 키우는 의과대학으로 가서 공부했다. 힘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졸업한 후에도 전문의 수련을 받는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서 ER Doctor가 되었다. 그 후에 이락과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전했다. 귀국한 후에 Flying Surgeon 시험에 합격하여 3년 전까지 근무했다. 그 후에 오하이오로 임지를 옮겨서 이 기간 중에는 병원 일을 하면서 주로 교육을 많이 받았다. 얼마 전에 영국으로 발령이 나서 전 가족이 미국을 떠났다. 이제 삼열이 부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는데 맏 아들이 다음 달이면 12살이 된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봄부터 가을까지 아침에 걷기 위하여 집사람과 나갈 때마다,
USAFA 라고 쓰인 러닝 셔스와 아주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자켓을 입고 걷는다. 사무실에 와서 옷을 갈아 입을 때에도 셔스는 주로 삼열이가 준 런닝 셔스를 입고 지낸다. 삼열이가 사관학교를 졸업한지가 어느덧 22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고 있다.
 
이만큼 입었으면, 다 떨어져서 걸레처럼 되어 버린지 오래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도 구멍 하나 난 곳이 없고 찢어진 곳도 없다. 런닝 셔스의 목과 팔부분에는 짖은 남색으로 된 튼튼한 것을 덧 대었기 때문에, 때도 차지 않고 늘어나지도 않는다. 가볍게 입고 나가는 자켓에도 USAFA라는 글이 선명하다. 옅은 청색과 짖은 하늘색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입을 만 하다.
 
내 추측으로는 삼열이가 호리호리하던 1학년 때에 입은 옷이리라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사관학교 2학년 때에 집에 왔을 때는, 벌써 군인다운 체구로 근육이 발달하였고 체중도 늘어 있었다. 지금의 나같이 삼열이가 집을 떠날 때에나 맞았을 사이즈 이다. 그렇다면, 26년이 지난 옷이고, 내가 입은 햇수만 치더라도 22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잘 입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재료를 썼고, 또한 날림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 부분이나 팔 부분에 짙은 남색의 다른 천을 댄 것이라든지, 셔스의 면의 올과 두께, 그리고 바느질이 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을 다하여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만든 물품이라고 생각한다. 고국의 신문을 보면, 군대에 납품하는 물건들의 비리며,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국방을 위한 각종 총기류며 중요한 무기의 납입에 부정부패가 많아서 무용지물이 되고, 따라서 국민의 혈세가 많이 낭비된다는 기사를 쉽게 접한다. 매우 대조적이다.
 
사관학교 4학년 때에 입은 옷과 모자는 세탁소에 맡겨서 깨끗하게 세탁했다가, 삼열이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두었을 때에 며느리에게 삼열이 것임을 알리고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입는 런닝 셔스 두 개 가운데 하나와 면으로 만든 두꺼운 자켓은 손자인 주선이에게 그 옷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 한 후에 전달해 주려고 한다. 손자도 앞으로 5년 정도면 집을 떠나서 날개를 달고 공부하기 위하여 어디론가 갈 때가 올 것이다.
 
나에게는 값비싼 것을 후손에게 전해 줄 것이 없다, 그러나 삼열이의 스토리가 있는 옷, 30여년 가깝게 입었어도 멀짱한 가족사에 스토리가 있는 옷을 맏손자에게 전해주는 것도 매우 값진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2016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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