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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듣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 대한 놀라운 소식들 들으며
 
    7월 23일 서울 영락교회김운성 목사님께서 설교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대한민국 건국과 기독교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하시는 성결교 신학교 박명수 교수님의 글을 인용 하시면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시절에 국무장관을 하신 덜레스 장관이 한국을 1950년 6월에 한국을 방문하셨던 사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미국 정치가 덜레스라는 분이 6월 한국을 방문해서 공식 일정을 갖지 전에 영락교회 예배 참석 하셨다. 영락 교회는 해방되던 해 12월 첫째 주일에 현재에 있었던 천리교 신전으로 쓰던 건물에서 공산주의에 넘어간 북한에서 탈북하신 한경직 목사님과 27명이 모여서 ‘베다니 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그러나 수 많은 신자들이 북한을 떠나 이남으로 내려 와서 교회로 모여들었다. 미군 부대에서 텐트를 구해다가 예배를 드렸지만 다 수용할 수도 없고 장대같은 장마비가 쏫아져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피난민 교회가 교회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맨 땅에서 건축을 시작했다. 잘 알려진 밥 피얼스 박사(세계 선명회 창립자)가 그 소식을 들으리고 그 당시에는 큼으로 큰 금액인 1만 오천불을 건축 기금으로 보내셨다고 한다. 덜레스가 예배를 드린 교회당은 건축이 완공 된 후 약 한 달 후였다고 한다.
 덜레스는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였다. 그도 독실한 신자였고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셨다. 그 당시 영락교회를 담임하셨던 한경직 목사님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셨는데, 덜레스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신 분이다. 외교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 그는 모든 공식 일정일 이전에 교회 영락교회 주일 예배 시간에 참석하셨다. 그는 피난민 교회에 참석한 성도들의 실상을 보면서, 울부짖어 기도하는 눈물 어린 피난민들의 간구를 본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본국으로 1950년 1월 10일에  미 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태평안 방어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라인을 변경하여야 한다는 급전을 곧바로 미국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게 급전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는  이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는 충분한 기초를 가진 나라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덜레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성도들을 목격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급전을 보낸, 그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외무부 장관등 요직 인사를 만나고 귀국했다. 그런데 그가 떠난지 3일 후인 6월 25 일, 주일 새벽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남한을  북 한은 탱크 242 대를 앞세워 침략하였다.
   놀라운 것은 6월 27일  UN안보리회의가 소집되었어 연합군 참전 결정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 주둔해 있언 미 육군 스미스 부대르 비롯하여  7월 1일 미군 1만 6천명 파병이 한국전에 피병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16 개국 참전 의료 지원등을 담당한 7개의 나라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결심하기에는 3년, 2차 세계 대전의 참전을 결정하기에는 2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는 사변은 6일만에 파병을 결정하였다. 얼마니 놀라운 세계사적인 결단인가!
또한 한경직 목사님은 유엔군 사령관이신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 공산당의 잔악함과 기독교 탄압 그리고 반 인륜적인 만행들과 남한 백성들의 고난과 눈물을 친필로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셨다고 한다.
세계 선명회 총재이신 밥 피얼스 박사님도 1950년 3,4,5월에 남한 전국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도운동을 하신 후에 귀국하셨다. 그는 한국 전쟁의 소식을 듣고 전 미국을 향하여 남한을 도와야 한다고 힘께 주장해서 여론을 모았다. 피얼스 박사님은 그 후에 군종 목사로 한국에 오셔서 많은 구호사업을 하셨다. 한국 전쟁 후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힘을 합하여, 불쌍한 전쟁 고아들과 남편을 잃고 자녀글 키우는 전쟁 미망인들을 도우셨다. 지금 잘 알려진 ‘기독교 세계 선명회’를 전후에 설립하셔서 한국 고아의 아버지가 되셨다.
   해방 이후인 1948년 겨울에 빌리 그라함 목사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 역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통역으로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 미국 뉴 멕시코 알버커키 에서 복음 전도집회를 하시던 중에 이 비보를 접하신 목사님은 고난받는 한국을 꼭 방문하시고자 결심하셨다. 그러나 전투지에 목사님이 가시는 것을 즉시 허락받지 못하셨지만 1952년 12월 2 일에 하락을 받으셨다. 목사님은 1952년 12월 17에 고국 을 방문하시어 전투에 임한 미군들을 만나 말씀을 증거하고 고생하는 한국 목사님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전쟁 고아들을 방문하여 전쟁의 참상을 보시고 미국으로 가셔서 한국을 꼭 도와야 한다고 힘주여 말씀을 하셨으리라.
   3년 이상의 피비린내나는 6.25 사변은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휴전이 됨으로써 포성이 끊기게 되었다. 결과는 온 산천이 파괴 되었고, 수 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실종자들과 부상자들 그리고 이산 가족을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종 통계(한국군의 피해 사항은 포함되지 않고 UN 군만 파악한 것임)
참전국 (21개국 / 전투 16 개국 / 비 전투 5개국)
파병자 수 (미국1백 60만명, 영국 5만 6천명. 카나다 2만 7천명)  
그 외의  13국가 표함 참전 UN 용사 총계 1.754,400 
 
사망자 수 (미국 36.492 /영국 1,177/ 카나다 516)
참전국 총 전사자 (3만 7,902명. 부상자 10만 3460명 /실종 3.950명 / 포로 5.817명)  
    한미 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제 1차 모임 서울에서 델레스 장관(아이젠하워 대통 령이 덜레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함) 제 2차 모임은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 톤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이승만 대한 민국 대통령이 참석하에, 한국의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미국무 장관이 역사적인 한미 동맹 조약에 서명하였다.
   미국 워싱톤 디 씨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벽에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동상과 전쟁에서 숨진 영웅들의 모든 이름을 새긴 기념벽이 둘러서 있다. 그 공원의 기념비에는 “대가 없는 자유는 없다” 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023년 8월 3일)
 
Number Titl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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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이름 없는 비석
83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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