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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역사를 살펴보면 165-180년에 그 당시의 로마 제국에 ‘안토니우스’ 라는 전염병이 있었다. 이 전염병의 실체는 천연두나 홍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시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로마 군인들이 매개가 되어 전파 되어 퍼져 나갔다. 이 전염병이 처음 발병한 이후 15년 동안 로마 전역에 퍼졌고, 로마제국 인구의 4 분의 1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 때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180년 3월 17일에 사망했다.
   두 번째 발생한 큰 전염병은 249-251년까지 창궐하면서 로마 시민이 하루에 5.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시 인구 중 3분의 2가 죽은 일명, 키프 리아누스 전염병이 있었다.
   1346-1353년까지 유럽에서 4.000만 명, 중국 3.000만 명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 1억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페스트(흑사병)는 역사를 뒤흔든 재앙이었다. 14 세기 중엽 전 세계 인 구를4 억 5.000만 명 정도로 추정할 때 매우 많은 숫자이다. 오늘 날의 세계 인구 비율로 바꾸 면 약 20억 명이 된다.
   1918년 유럽에 다시 한 번 끔찍한 전염병 대재앙이 휘몰아쳤다. 스페인 독감 재앙이다. 스페인 독감은 조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도록 돌연변이 된 것이다. 1918년 최초 발병부터 1920년까지 5억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은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1차 세계 대전 사망자인 900만 명보다 약 11배 많은 인명의 피해였다.
   이번에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는 2020년 2월 부터 급격히 퍼지기 시작하여 2021년 여름에 델타로 변이 되었다. 변종 되기 이전에 이미 1억 5.000만명의 감염자와 315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 미국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코로나19 발병 이후 인도의 공식 발표인 사망자는 41만 4.482명이지만, 실제로는 10배 정도 더 많았을 것으로 판단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많은 나라에서 사망한 숫자는 자세히 알수 없지만, 사뭇 많은 사망자가 있었으리라고 보는 이유는 많은 후진국에서의 통계의 정확성이 문제로 남는 것같다. 한 영국의 연구소는 코로나 19 발병 이후 2021년 중반 까지 확진자는 24억 명, 사망자는 1.045만 명이 되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지금은 오미크론으로 변종되었다가 또 조금 약한 변종이 생겨서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 19로 팬데믹이으로 인하여 사회적 충격이 대단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혼란, 실직 으로 인한 빈곤의 문재, 병원 시스템의 혼란으로 인한 코로나 이외의 환자들의 진료의 누적으로 인한 사망의 증가등 수 많은 문제를 나열할 수 없을 것이다. 백신 주사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이나 고통 받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허무와 고독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선교지에 있던 선교사들이 많이 철수 했고, 선교사 지망자도 10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나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 그리고 교우들과노인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아파트 이웃들도 모두 어려움을 당했고, 당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노인 아파트에서도 한국 주민 1명을 포함하여, 여러 분이 코로나 19로 사망하셨다. 남편도 아내도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시신도 병원에서 처리하여 화장을 하고 유족은 유골함을 받아야 했다. 초기에는 유골함을 놓고 고별식도 가족 중에서도 몇 명만 참가하도록 통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코로나 19로 인한 죽음은 준비된 죽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죽음도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남편, 자녀가 죽어가는 상황에 있어도 가족과 친구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아무것도 해 줄수 없었다. 심지어 묘지가 있어서 땅에 묻힐 때에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한 사람의 값진 인생이 코로나 19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애처롭게 떠났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여러 개가 있다. 코로나 19 사태가 시작되자 일상 생활의 번화 가운데 하나는 식료품을 사는 것이었다. 수퍼 마켙마다 노인들을 위하여 이른 아침에 약 한 시간을 할당하였다. 일찍 나가서 시간 전에 도착해도 이미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일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마켓의 크기에 따라서 일정한 사람을 들여 보내고나서 그들 가운데서 나오는 사람 숫자대로 몇 사람씩 들여보냈다. 그리고 물건을 구입하는 수량도 제한했다. 더운 여름에는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담아오는 봉투도 전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마켓에서 주는 것을 값을 지불하고 가지고 와야 했다.
   문제는 이 전염병에 노인들이 감염될 확률이 많고 치사율이 높기 때문에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라고 했다. 우리 부부의 건강을 걱정한 딸과 사위의 헌신적인 도움을 많이 받아서 식료품과 위생 용품의 조달은 걱정 없이 지나갔다.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서 약 20분 떨어진 곳에 사는 딸과 사위와 함께 때로는 큰 외손녀까지 잘 도와주었다. 딸과 사위가 지난 해 가을까지 매주 한 번 정도 식료품과 휴지, 마스크, 비닐 장갑 및 손 소독제 및 기타 일용품들을 사서 아파트로 배달을 해 주었다. 아무래도 양식 위주의 생활을 하는 딸네 식구 덕분에 식생활이 많이 서구화 되었다. 큰 외손녀 는 피자, 캐익, 빵, 쿠키, 김치국 등을 끓여서 엄마나 아빠와 같이 와서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비록 힘든 시기이지만 가족의 따듯한 배려와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경험한 계기도 되었다.
      코로나 19가 시작된 직후부터 나의 생활에 이런 저런 변화가 생겼다. 2020년 이월 하순에 집사람의 갑작스런 아픔으로 인하여 간 밤에 응급실에 가서 약 12 시간만에야 진료를 받게 되는 어려움을 시작으로 하여 4 번이나 응급실을 가서 받은 치료 과정을 보면서, 아픈 집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감은 설명할 수가 없다. 입원을 해도 보호자를 볼 수 없고, 퇴원할 때에도 의사를 만나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휠체어에 환자를 실어서 입원해서 치료한 것과 의사의 의견과 처방 약에 관한 설명서 정도의 서류를 들려서 내보냈다. 또한 약해저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에 나 자신도 함께 마음 아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나의 표정도 많이 바뀐 것을 내가 친히 알게 되었다. 전에는 잘 웃고, 재미 있게 사는 스타일이었느데, 거울을 보니 얼굴에서 웃음이 많이 사라졌다. 일명 포커 훼이스가 된 것이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많은 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려고 하지만 어색하기 그지 없는 형상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사람이 아파서 힘들어 하니까, 이전에는  TV저녁 종합 뉴스는 늘 빼놓지 않고 시청했는데 2020년 2월 하순부터 현재까지 한 번도 TV를 시청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미국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잘 모른다. TV 대신에 집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2022년 1월 8일 저녁부터 한 눈이 잘 안보이게 되어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에 대한 염려, 이제는 기력을 많이 잃어서 갑자기 피곤하다고 자리에 누운 모습을 보며, 한가하게 발을 쭉 펴고 TV를 시청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안과 의사의 말에는 집사람의 왼쪽 눈을 검사한 결과 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스트록이 지나간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안과 의사가 백신을 몇 번 맞았느냐고 묻기에 3 번 다 맞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안과 의사에게 왜 백신에 대하여 묻느냐고 하니, 백신 접종 후에 눈에 이상이 있다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여럿이 있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19 예방 백신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2021년에는 나 자신도 신체 부위 3 곳에 이상이 생겨서 MRI 촬영을 한 결과 의사가 혹시 암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그 외에 여러가지 검사와 조직검사들을 했다. 이런 저런 약을 먹었다. 게다가 내가 속한 교단에서 20여년 전에 만든 교재의 개정판을 편집하느라고 몇 달 동안 매어달렸다. 문제는 고국에서 인쇄를 하게 되었는데, 초벌 인쇄 한 것을 수정해서 보냈는데, 확인해 보니 약 한 달이 되어도 미국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약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개정판 인쇄가 끝났다. 그간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였기 때문인지, 전립선과 방광에 문제가 생겼다. 집사람에 대한 긴장, 병원 예약과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드나드는 일의 어려움 등이 쌓였는지 눈 밑에 심술 굳게 보이는 반달 같은 군살이 불룩 튀어 나왔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몇 달이 지나도록 이발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염병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사회적 거리와 의무적 마스크 착용 때문에 이발소나 식당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작은 전기 이발기로 머리를 깎아야 하겠다고 시도했다. 집 사람은 건강도 좋지 않고 그 기계로 머리를 깍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망설였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내 머리를 깍다보니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쥐가 뜯어먹을 것 같은 머리를 하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집 사람의 머리도 길어지니 내가 기위로 머리를 다듬어 주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나의 머리털이3분지 1 정도의 흰 머리가 반 이상으로 늘었다,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걷기를 해왔다. 코로나 19 사태 이전에는 노인 아파트 경내를 벗어나서 경치가 좋은 옆 동네 길을 걸었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 부터 지금까지는 아파트 경내의 주위를 주로 걷는다. 그 이유는 집 사람이 건강상의 이유로 햇빛이 있는 오전 10시경에 천천히 혼자 아파트 주위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그 시간에 함께 걷고 싶지만 내가 천천히 걸어도 빠르다고 하면서 부담스러워해서, 나 혼자 이른 아침에 걷는다. 그러나 집사람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즉시 달려 오려고 멀리 가지 않고 아파트 경내만 돌고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발견하는 것은 점점 규칙적으로 걷는 분들이 줄어드는 것을 본다. 신체적으로 연약해 지는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밖에 나가는 것이 전염에 노출된다고 생각해서 주저하는 분들오 있을 것이다. 이곳 노인들을 보면 평균적으로 체중이 많이 늘었다. 간혹 걷는 분들을 만나면, 현재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거의 모든 분들이 마스크를 쓰고 걷는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익숙해져서 만나면 멀리 사를 벌리고, 어떤 사람은 서로 만남을 주저해서 오던 길로 되돌아 걷는 분도 계시다.
   2018년 1월 18일에 내가 사는 아파트를 재 건축하는 일 때문에 10여 개월을 모텔에서 살다가 재 입주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A동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수리를 해서 입주했고 다른 3 개의 동이 있어서 약 2년여 기간이 걸려서 모든공사가 끝나서 모든 주민이 재 입주하였다. 건물 수리 이전에는 아파트 관리 회사에서 발렌타인 데이나, 독립 기념임,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에는 온 주민이 모여서 파티를 열어 주어서 주민이 서로 사귀어 얼굴을 익혔다. 그 외에 사회 단체에서 와서 안전과 건강 강좌도 열어 주고, 합창잔이나 연주자들이 와서 위문을 해 주기도 했다. 감사절에는 보이스카웃 학생들이 각 아파트마다 다니며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2 개월에 한 번 정도는 주민 회의를 통하여 공동 생활에 대한 주의 사항과 안전과 공고 사항을 안내 받기도 했다. 그러니 한 마디로 많이 활동도하고 서로를 알고 사귀며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2018년 정초 이후에 아파트 주민을 위한 모임이 없어져서, 30여명이 사는 한국 분들도 점차 거리가 멀어저서 서로가 어색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코로나 19 사태 이전에는 주간 중에 하루는 온종일 딸네 집에 가서 지냈고 간간히 들러서 식사도 했다. 온 가족의 생일이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나 부활절,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에는 딸네 집에 모여서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나고 집사람의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딸네 집에서 가족이 모여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식사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코로나 백신을 3차로 받은 지난 해 초가을 이후에 간혹 모이기는 했지만, 어린 손녀 딸들이 혹시 감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집 안에 들어가서 식탁에 둘러 앉지 못하고, 뒷뜰에서 식사 할 때만 마스크를 벗고 모였다. 손녀 딸을 만나도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쓰고 손을 흔들어 주는 정도로 밖에 할 수 없으니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은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만 50년이 된 금혼식이었다. 자녀들과 의논한 후에 때를 정해서 만나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이러한 코로나 19 사태가 있지만, 한 편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시는 분들이 있음에 감사하가.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서 가까운 대학에서는 Second Harvest 라는 단체에서 노인들과 저소득 층을 위한 식료품과 야채가 든 상자를 주 1 회 공급해 주고 있다. 이 단체에서는 베이 에어리아에 사는 주민 45만 여 가구에 매 주 마다 식료품과 채소를 나눈다고 한다. 심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 19 초기에는 내가 속한 교회와 한인 사회 단체에서도 생활용품과 식품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어느 한인 단체에서는 약 2년간 2주 마다 한 번씩 고기국을 끓여서 한국 사람들이 거주 하는 아파트의 노인들에게 배달해 주는 따뜻한 분들의 수고와 사랑의 대접을 받았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분들의 아낌없는 나눔을 받아 힘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하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의 물가 상승은 참으로 놀랍다.  물류 대란과 생산량의 저하, 일손 부족, 자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물가의 상승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랐다. 식당의 음식은 약 두 배 정도가 오른 것 같다. 식료품의 가격을 비롯하여 비상 의약품의 값도 정말 많이 올랐다. 가장 두드려진 물가 상승이 직접 피부에 닿는 것은 자동차 개스 값이다. 이 지역의 자동차 개스 값은 약 두 배나 올랐다. 보통유가 6불정도이고 고급유는 7불이 넘는다! 임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물가가 급상승하면 빈곤층이 늘어갈 수 밖에 없다. 이 지역에는 코로나 19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홈레스가 되었다. 도로 신호등 곳곳에 도움을 청하는 종이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많다.
  내가 코로나 19 사태를 겪어오면서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예기치 못한 좋은 결과도 있다. 40여 년간 약 560 편의 찬송 시를 써왔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코로나 19 사태 이후 2년 4 개월이라는 기간 동안에 250여 편의 찬송 시를 썼음을 발견하였다. 집 사람의 건강 문제와 맞물려서 나의 건강 상 문제가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회적인 문제, 생활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불안정 그리고 불확실성 때문에 혼란한 기간 동안에 나도 놀랄 만큼의 찬송 시를 쓴 것이다. 힘들고 어려우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도우심을 청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되니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며 매어달린 결과인 것이다.
      요즈음은 각종 검사를 받으러 병원을 갈 때에도 온도 측정이 없어졌다. 그간 의사와의 만남은 비 대면으로 했는데, 지금은 대면으로 바뀌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비록 코로나 19가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질병예방 관계자들이 예상하기로는 2023년 중엽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리라고 한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분들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추상같던 정부와 보건 기구에서도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쓰는 것을 권장한다.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다. 물론 직장도 마스크에서 자유로와 젔다. 각종 실내 운동 경기를 참관하는 수 많은 사람들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침을 튀기면서 고함을 지르며 응원을 한다. 코로나 19의 여파가 아직 있지 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와 함께 살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함께 무릎을 가까이 앉아서 대화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 공부를 할 그날을 기대한다. 교 회당에서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찬양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손에 손을 잡고 서로 인 사하고 격려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마스크를 벗고 만남으로써, 서로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웃어 줄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린다. 서로 멀어진 거리가 좁혀지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나의 얼굴에 환희와 감격이 되살아 날 그 때가 올것을 믿으며 전진하여야 하겠다. 희어진 머리털이 검어질 수는 없겠지만, 심술 굳은 노인네로서 자리매김을 한 나의 작은 눈 밑에 반달처럼 되어 부어 오른 것도 점차 없어저서 옛 얼굴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1년 5월 29일 씀)
 
 
 
  
 
 
 
 
 
 
 
Number Title Reference
88 ​한 번도 못본 국군 전사자 유해
87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
86 ​대기의 강 (Atmospheric River)
85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84 이름 없는 비석
83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82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OOO.
81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올림픽
80 내가 겪은COVID-19으로 인한 변화
79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
78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휄로십 프라자의 겨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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