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에세이
이름 없는 비석
                                               이름 없는 비석

   고국에 닥친 장기간의 가뭄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 제 67회 현충일이었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기념식에 참석한 인사들은 다 흰 비닐 옷을 입고 반갑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엄숙하게 치루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내가 월남전에 참전한 후에 제일 먼저 간 곳이 동작동에 있는 국립 현충원이었다. 내가 특별한 애국자이어서가 아니라, 함께 참전했다가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의 묘를 찾아 보고 싶어셔였다. 그 때가 벌써 53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으로 빠름을 실감한다.
   기념식을 보고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나와서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는 순서가 있었다. 그 여성은 2020년 6월23일에 작고하신 고 황규범 장군의 외손녀 딸이다. 그 분이 읽으시는 편지를 듣는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의 모습이 숙연해졌다. 그 분을 통하여 37만 개가 넘는 순국 영령들의 비석 가운데 유일한 이름 없는 비석 ‘소위 김 00의 묘’ 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열세인 우리 국군이 물밀듯 내려오는 북한 군을 맞아서 힘겨운 전투를 했다. 낙동강 이남을 보전하기 위하여 피아 간에 생명을 건 치열한 전투가 경상북도 안강 지구 도음산 384 고지에서 있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장병 가운데 1천 5 백명이 전사했다. 이런 격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1개 소대가 합류하였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부대의 소대장은 전쟁일 일어났을 때에 육군 사관학교 1 학년이었다가 소위로 임관한 황규범 소위였다. 지원 파견을 온 소대장과의 만남은 전쟁터에서 서로 이름 세 자의 통성명도 없이 “황 소위 입니다. 김 소위 입니다” 로 끝나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전투지에 새로 온 김 소위가 “지형을 살펴보겠다” 하면서 일어나서 나갈 때에 적이 쏜 기관총에 맞아서 전사했다. 그러니까 서로 인사를 나눈지 몇 분도 안 되어서 전사했는데, 그 분의 신분이 김 소위라는 것외에는 그 분의 이름을 알 길이 없었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계급장도 이름표도 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추측으로는 6.25 사변이 일어난 직후에는 군인이면 누구나 받는 수 십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군번표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시신을 거두지 못해도 나중에 유해 가운데서 군번표를 찾으면 모든 신분을 알 수 있다.
   황 소위는 김 소위의 시신을 큰 소나무 밑에 가매장을 하고,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마음에 다짐하면서 계속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군 생활을 하던 황 소위가 늘 생각하는 김 소위의 묘를 찾은 것은 그가 전사한 지 14년이 되었을 때였다. 그 곳을 가 보았지만 지형이 바뀌고 숲이 우거지고 기억도 희미해져서 김 소위를 가매장한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드디어 시신을 찾아 관계 기관에 사정을 알리니 현충원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유골을 안장하게 되었는데, 김 소위라는 것 밖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그래서 ‘소위 김 00의 묘’ 라는 비석이1960년 5월 24일에 국립 묘지 54 구역에 안장 되었다.  그 김 소위님의 무덤을 황규범 소위는 매년 이런 저런 명절 때마다 걸르지 않으시고 꽃을 들고 찾으셨다고 한다.
   황 소위는 김 소위가 묘지에 안장 된 이후 26년간 줄곳 김 소위의 가족을 찾기 위하여 수소문을 했다. 드디어 김 소위가 전사한 지 40년이 되었을때에야 김 소위의 가족을 찾았고 그의 이름이 김수영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 하였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을 만났고, 김 소위라는 이름 만을 아는 한 전우의 죽엄을 잊지 않고 감동적인 역사를 남겨준 황규범 준장님의 아름다운 전우애에 감동을 남겨 주신 것이다.  이 시대에 쉽게 찾을 수 없는 위인의 잊을 수 없는 실화를 손녀딸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함을 드린다.
   2020년 6월 23일에 작고하신 고 황규범 준장님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김 소위님의 묘 옆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셨다. 넓은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히시는 것에 대하여 난감해 하는 가족들에게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김 소위님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시면서 “죽어서도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다” 고 하셨다. 영상으로 황 장군님과 김 소위님의 묘비를 보여 주었다. 김 소위님의 이름을 알아냈지만, 아직도 묘비에는 ‘소위 김 00의 묘’ 라고 적혀 있다. 왜 이름을 넣지 않았는지에 대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한 것은 국가 보훈처에서 유족들에게 6.25 사변에 얽힌 처참한 기억들 가운데서도 참으로 고귀한 두 전우의 스토리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싶다는 부탁을 가족들이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비석 앞에는 추념비를 따로 만들어서, 김 소위 님의 본명이 ‘김수영’ 님이라고 새겨 놓았다.
   많은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산다고 하셨던, 할아버지께 눈물을 글썽이면서 읽은 외손녀의 이름은 전미도라는 분이었다. 그 분은 “힘겹게 지켜낸 이 나라를, 자녀들에게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기리 전하여 지켜가겠습니다. 할아버지 나중에 반갑게 뵈올께요” 하면서 끝맺었다.
                                   ****  ***  ***
   현충일이 되면 많이 부르는 비목이라는 가곡이 있다.
                   
                     비목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지스런 추억은 애닯어
서러움 알알기 돌이 되어 쌓였네.
      (한명희 시. 장일남 곡)
  
   위에 올린 시는 ROTC 2 기 장교로 임관하여 강원도 평화의 땜 북쪽에 위치한 백암산 계곡에서 근무한 한명희 소위가 목격한 무명 용사의 비목을 보고 쓴 시이다. 그가 소대장이 되어 1964년 강원도 백암산의 초소에서 근무할 때에, 순찰을 하던 중에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낀 군인이 전사한 것을 기념한 돌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그 분의 글을 읽어 보면, 부대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땅을 파다 보면 유골이 나왔고, 주위에는 구멍 뚤린 철모와 깨진 화이버가 딩굴었다고 한다. 그 돌 더미에 나뭇 가지로 만든 십자가가 썩어 가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본 한 소위는 그 때의 찢어지는 듯한 심정을 가눌 수 없어서 한 편의 시를 썼다.
   한 소위가 제대한  후에 방송국에서PD 로 근무 하면서, 작곡가 장일남 님께, 그 시를 쓴 사연을 설명하고 보여주니, 이내 그 자리에서 작곡한 곡이, 현충일이나 국가 유공자들을 기리는 기념식에서 독창자들이 늘 부르는 불후의 가곡이 된 것이다!
   내가 6.25 사변 직후에 다닌 초등학교는 산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 곳이었다. 샛길을 걷다 보면, 여기 저기에 유골들이 흩어져 있늘 것을 보면서 다녔떤 때가 기억 난다. 강원도 산골짜기니 격전을 치룬 고지마다 얼마나 많은 전사자들이 전쟁 중이기 때문에 묻히지 못한채 시신이 방치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군번도 받지 못하고 전장에 나가서 전사하신 분들이 얼마나 될까?
  
   1982년 6월 25일 중앙일보의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6·25를 전후해서 열혈청년들은 대한청년단·국민회·태극단 자치회·청방단 등을 스스로 조직, 마을과 고장을 지키거나 전선에 나가 탄약과 주먹밥을 나르며 국군을 도왔다. 이때 희생된 민간인은 줄잡아 85만∼1백만명(내무부 조사).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 의병(의병) 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상은 물론 합동위령제나 위패를 봉안할 장소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더우기 이들의 활약을 기록한 투쟁사 1권도 준비되지 않아 이들의 호국의지는 해가 갈수록 잊혀져가고 있다. 일부 유족들은 10여년 전부터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43 미황사에 「무명용사 영령봉안소」를 마련, 6천6백10위의 「군번 없는 반공투사」의 위패를 봉안, 현충일과 평양입성기념일(10월18일)에 위령제를 지내고있다.
한 국방부 역사 기록관은 말하기를 이분들의 전공은 6.25 사변 전쟁 영웅사에 넣어야 할 만한 큰 업적을 남긴 분들이 있다고 했다. 군번이 있든지, 없든지 조국을 위하여 죽음을 감수한 수 많은 분들에 의하여 보존된 자유 대한 민국에서 살고 자라서 이제는 미국에 와 있게 된 것은 ‘생명을 내어준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2020년 코로나 19 사태를 미국에서 지낸 나는 그 당시의 기념식을 못 보았다. 찾아 보니 육,해,공, 해병대의 군복을 입은 음악 병사 4 명이 국립 현충사를 배경으로 하여 ‘비목’을 불러 준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많은 성악가들이 부른 것도 들었지만, 현충원에서 젊은 네 병사가 부른 ‘비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1995년 화천군 동촌리 평화의 댐에 비목공원이 조성되었다. 1996년부터 6월 6일 현충일을 전후하여 비목공원에서 비목문화제를 개최하여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넋을 추모하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하는 위령제를 가진다.
    그리고 강원도 화천에는 현충일을 전후하여 ‘무명 용사의 날’을 정하고 문화제를 연다고 한다. 누가 쌓아 준 돌무덤도 비목도 없이 아예 성도 이름도 모르는 무명 용사들이 흘린 피가 삼천리 강산에 지금 ‘우리의 피를 잊지 말아주세요!’ 라고 메아리 치고 있을 것이리라.
 
                                                                     (2022.6.10)
Number Title Reference
88 ​한 번도 못본 국군 전사자 유해
87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한국 전쟁에
86 ​대기의 강 (Atmospheric River)
85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84 이름 없는 비석
83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82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OOO.
81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올림픽
80 내가 겪은COVID-19으로 인한 변화
79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생일
78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휄로십 프라자의 겨울 모습
77 Name Label
Page: (1/8), Total: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