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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이 어머님!"
“영진이 어머님!”
 
약 60 여년 전, 6.25 사변 때에 불타버린 집 터위에 어머님이 집을 지으셨다. 전세로 들어오실 분들에게서 선금도 받으시고, 홀로 되셔서 어려운 살림을 하시면서도 조금씩 모아두신 돈과 빚을 내셔서 방 세 개가 있는 양옥 집을 지으셨다.
 
그 때에 남편 되시는 어른은 서대문 구청에 다니시는 따님 둘을 두신 분이셨다.
방 하나는 우리 식구가 살았다. 다른 두 방은 세를 주었다. 그 때에 안방에서 사신 분의 사모님을 보통 부르듯이 큰 따님의 이름을 따서 “영진이 어머니”라고 어른들을 부르셨고, 우리들은 그냥 “아주머니” 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 나이가 드신 형들은 군대에 있으셨고 큰 누나는 다른 곳에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형과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작은 마루 하나 사이인 안방과 마주한 건너 방에서 살았다. 그 당시에 어머님이 친척의 소개로 서울역 근처에 있는‘국제 회관’이라는큰 한식 식당의 흰 천으로 된 테불 보를 매일 빨아서 풀을 먹여 대림질을 잘 해서 납입하고, 더러워진 테블 보를 가지고 와서 손으로 빨아 말려서 다림질을 매일매일 하셨다. 이 글을 읽을 나의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왜 손으로 다 빨아야 하는가? 간조기는 없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 고국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누나는 매일 그 일을 하셔야 했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쉴 수가 없으셨다.
 
대개는 저녁 밥을 다 먹고 치우신 후부터 늦은 밤까지 다음날 이른 아침에 납입하실 테불 보를 대리셨다. 그러니 안방에 사시는 어르신네들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 당시는 숯불을 넣은 다리미를 썼는데, 조악한 물품들이었기 때문에 대림질을 위해서 움직이거나, 자리에 놓거나, 숯을 더 넣을 때에는 금속성 소리가 났다. 주무시는데 많은 방해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불편하심을 나타내시는 기침 한 번 하시지 않으셨다고 하신다. 아침에 뵐 때 인사를 하면 아주 밝은 얼굴로 맞아 주셨고, 지난 밤에 수면 방해를 받으셨을 것에 대한 어떤 암시도 주시지 않으셨다. 미안해 하시는 어머님을 오히려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신 분들이셨다. 그래서인지 두 따님도 아주 밝고 단정하게 자랐다.
 
여러 해를 사시고 이사를 가신 후에도, 가족처럼 지내셨고, 특히 나의 어머님에게는 딸처럼 어머니를 존경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사랑의 손길을 펴신 분이 바로 “영진이 어머님”이셨다. 내가 지나온 날들 가운데서 잊지 못할 은혜와 격려를 해 주신 여러분들을 기억하면서 쓴 ‘감사, 또 감사’ 제 4편에도 기록한 바와 같이 함께 사시던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내가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 대학 입학금이 많이 모자라서 고민하던 때에, 납입 마감 몇 시간을 남겨두고 입학을 포기할 즈음에 땀을 흘리시면서 남에게서 빌려오신 돈을 내 주시면서, “열심히 공부하라!” 고  격려하셨던 분이 바로 “영진이 어머님”이시다.
 
내가 1980년 3월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에 고국의 젊은 선교회 여름 수련회에 강의하기 위해서 갔을 때에 한 번 뵈온 이후에는 연락이 끊겼다. 늘 어르신네에 대한 미안함과 연락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다. 내가 소속한 C&MA교단의 한인 총회 감독이 되어서 남 가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플러톤으로 내려갔을 때에 L.A에 소재한 교단 소속 교회의 장로님으로 아주머님의 일가가 되시는 분이 다니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2년 선배로써, 바로 내 위 형님의 친구셨기 때문이다. 교회로 전화를 걸어서 사업장의 전화 번호를 알아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출장이 잦으셔서인지, 잘 전달이 안 되어서인지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아서 나의 은인이신 아주머님의 연락 전화 번호를 알 수 없었다. 지금부터 약 12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2 주 전에 현재 교단 감독님과 전화를 하는 가운데, 남 가주에 가셔서 방문하실 교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가운데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연락 하려고 많이 시도했던 그 장로님을 만나신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담임 목사님이 고국 방문 중이시기 때문에, 대신해서 교회의 평신도 대표인신 장로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께 그 장로님에게 내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나를 기억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장로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다고 말씀을 드려 달라고 했다.
감독님이 그 분의 허락을 받고 내게 주신 전화로 장로님과 기쁜 대화를 나누었다. “영진이 어머님”이 생존해 계신다고 하시면서 고국의 전화 번호를 주셨다.
 
고국의 전화 번호를 받고, 전화를 걸면서도 거의 구십이 되신 어르신이기 때문에 나를 기억하실까? 전화를 받으실 수 있을까? 건강은 어떠실까?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갔다. 드디어 벨이 몇 번 울린 후에 “여보세요?”라는 매우 힘차고 밝은 음성을 듣고 저으기 놀랬다. 그래서 “미국인데요. 저는 이흥구라는 사람입니다. 영진이 어머님을 찾습니다.”라고 말했다. 전화로 생생히 들린 말씀은 “이흥구 목사님, 제가 영진이 어머니예요.”라고 대답하시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건강이 어떠시냐고 하시니 매우 좋다고 하셨다. 세상을 떠나신 남편 어르신네가 공직에서 은퇴하신 후 부터 시작하신 사업을 지금도 운영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아들이 토요일이면 저녁이면 꼭 들러간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아드님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지만, 어머님 말씀으로는 늦게 아들을 보셨는데 잘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여러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6월 8일 이곳 시간으로 토요일 새벽 3시이면, 고국에는 토오일 저녁 7시가 되기 때문에 전화를 걸어 아주머님께 인사를 드리니 아들이 와 계신다고 하면서 바꾸어 주셨다. 내가 아주 오래 전에 뵈온 부모님에 대한 추억과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아들 되시는 분께서 어머님께서 여러번 우리 가정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특히 나의 어머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셨던 사실을 이야기 하셔서 나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고 하셨다. 나이를 물으니 56세라는 것이다.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다.
 
아드님과 이 메일 주소를 나누면서 어머님의 주소를 꼭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머님의 주소를 받게되면, 출판 된 찬양집과 찬양 시집을 예쁘게 포장해서 감사 편지와 함께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약 60 여년 전, 사랑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인격자셨던 어르신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화를 받으신 아주머님의 인자하신 모습, 땀을 흘리시면서 숨을 몰아 쉬시면서 입학금을 가지시고 집으로 달려 오셨던 그 귀하신 모습을 지금도 보고싶다.
 
(주후 2013년 6월 1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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