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
|
|
| 성경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
성경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교회를 사임할 때, 은퇴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개척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함께 일할 분들이 있으셨음에 감사할 뿐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전할 기회는 주님이 주신 것이다. 마지막 날 교인들이 석별의정을 아쉬워하며 모아준 930불이 전부였다. 은퇴금 문제가 사역을 끝내면서도 문제가 되는 교회들을 보았다. 그렇다고 은퇴금이나 연금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교회를 사임할 때는 새로 오시는 목사님의 연금을 꼭 부탁 드리고 떠났다. 그러니 9월부터는 생활비가 나올 곳이 없었다. 사임 후 몇 달 지난 후에 쓴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눈을 뜨니 새벽 2시 30분이었다. 전과 같지않게 잠이 쉽게 들지도 않고, 또 깨는 시간도 일정치 않다. 교회를 사임한 이후 젊은 선교회 개척의 사역이 갖고 있는 어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직장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머지 않아 올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일까.
1년 후원금액이 최소한 12,000불 정도가 되어야 젊은 선교회 운영이 된다. 현재로는 약 반 정도에 머물고 있다(당시에는 산 마태오 은성 교회 설교 목사로 사례를 받아서 일부는 젊은 선교회 후원하고 일부는 생활에 보태 썼다). 후원금 모집에 대한 글을 보시고(그 당시 ‘달리다굼’ 이라는 소식지를 내었음) 협력해 주신 분은 정 집사님이라는 분 한 분 뿐이다. 개척자의 길이 참으로 험하다. 삼열 엄마의 말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은 결혼을 하지 말고 혼자 가야 할 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이하는 생략)>.
미국 젊은 선교회를 시작할 당시, 딸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학교 배구 선수였다. 집 사람이 버는 것이 생활의 거의 유일한 수입이기 때문에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여서 살아야 했다. 제일 먼저 줄여야 하는 것이 식비였다. 의복이나 다른 것에 대한 경비를 우리는 최소한으로 줄여왔기 때문에 다른 항목이 없다. 그 때 본의 아니게 금식을 많이 해야 했다. 지금도 마음 아픈 것은 딸이 크는 나이에, 운동을 하면서도 여러 달을 하루에 2끼만 먹었다. 그 때에 집사람의 고충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에 선교를 나가면 협력하는 교회도 있지만 이곳 도시의 젊은이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젊은이들을 보내 주어도 “수고한다.” “식사 한 번 하자.” “장소가 필요한가?”라는 말을 해 주시는 한국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이상한 색 안경을 끼고 보시는 목사님들도 있으셨다.
나는 언제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시는 것을 받아서 일해야 하는 Faith Mission 방법으로 사역을 해 왔다. 그러므로 개척한 후 사임한 교회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비록 힘들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은 꼭 채워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낮에 내가 살던 아파트에 있는데(사무실이 없으니, 나가 일할 장소가 없었다.) 이 경석 형제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함께 꿈을 나누고 무릎 꿇고 기도했다. 이 경석 형제님은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온 1.5세이다. 이 형제는 내가 산호세 성서교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난 청년 가운데 하나다. 내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교회학교 교사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출석하는 교회를 물어보니 성경을 잘 강해하시는 목사님이 계신 전통 있는 교회였다. 목회자로서 늘 조심할 것은 나와 교제를 나눌 분이 교회 목사님의 마음에 염려를 드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목사님의 허락이 없이는 가르칠 수 없음을 분명이 말했다. “알겠다.”고 갔는데,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왔다. 그래서 함께 빌립보서 성경을 공부하는 만남을 갖게 된 형제였다. 이 경석 형제의 노력으로 산호세 주립대학 한인 기독 학생회가 조직되었고 초기에는 내가 말씀으로 섬길 기회를 가졌다.
다시 나를 찾아 왔을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시작하여 열심히 일하던 때였는데, 사업 초기이니 재정이 힘들 때였을 것이다. 그 당시 나와의 성경공부는 얼마간 정지된 상태였지만 계속 서로 연락하고 만났었다. 자기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회사가 150개 정도면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말을 해서 함께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도 있었다. 가정도 이루고 아이도 있어서 씀씀이가 많을 때였다. 그런데 내게 제의하기를 “매주 토요일마다 사무실에서 모여 성경을 공부하자.”고 했다. 이 일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기 바라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지만, 내 생각에는 나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 사무실에서 새벽에 모여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그리고 간간히 물질로 감사를 표시했다. 지금도 이 경석 집사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하고 있다. 내가 몇 년 후에 산호세를 떠나 L.A로 내려갈 때 젊은 선교회를 맡아 주었다.
그러니까 이 경석 형제(지금은 안수집사)를 알고 주 안에서 교제한지가 약 26년 정도가 된다. 지금 내가 ‘감사, 또 감사!’를 쓰는 장소는 바로 이 경석 집사님의 사무실의 한 방이다. 내가 글을 올리고 있는 이 웹사이트도 이 집사님이 만들어주신 것이다. 내가 2008년 여름에 이곳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자기 사무실이 내가 임시로 머무는 모텔에서 멀지 않으니 빨리 만나고 싶다고 해서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날 “목사님, 은퇴하셨으니 사무실이 없으시겠네요. 제 사무실에 오셔서 일하세요.”라고 하면서 조용한 방을 제공해 주었다. 이 집사님은 CBMC(기독교 실업인회)에서 열심히 사역하시면서 몸 된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시는 일꾼이다. 부인 되신 전도사님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과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딸을 두고 다복하게 산다. 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하여 말씀대로 살고자 헌신된 분이다. 나는 이 집사님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동시에 늘 형제처럼 허물없이 사랑과 친절을 가지고 배려해준 넒은 마음 때문에 훈훈하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분이다.
이 집사님은 젊은 선교회 수련회 때 특강도 해주었고, 그 외에도 모임의 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모임이 발전해 나가니, 그룹으로 좀더 자주 모이고, 개인적으로 양육할 장소가 필요했다. 정든 Redwood Covenant Church 에서 Fremont에 적당한 장소로 옮기게 된 것은, 작은 사무실과 함께 어느 때나 모일 수 있는 큰 교실 같은 것이 그곳에 있었다. 주인은 한국 분이었는데, 우리들의 취지를 좋게 보시고 싼 값에 빌려 주셨다. 그곳에서 약 2년 있었는데, 건물 주인이 법적 문제가 생겨서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 경석 집사님이 호의를 베풀어 주어서 본인 사무실에서 저녁 시간에 모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모이기는 어려운 것이다. 장소로 고생을 많이 하게 되어서 Jon Martin 목사님과 의논하니 주말에 교회 건물을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시면서 창고로 쓰던 친교실 뒤에 있는 방 두 개를 사무실로 쓰도록 해 주셨다.
그때 이미 산호세 성서교회는 성장해서 큰 미국교회 건물로 이사간지 오래 된 때였다. 그 때 나는 남 가주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정도 금요일 저녁에 올라와서 토요일에 리더들과 모임을 갖고, 토요 모임에 말씀 증거를 했다. 그러나 주일 새벽에는 남 가주에 개척한 교회 설교를 위해서 내려가야 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를 6시간 정도 운전하고 올라오고 또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걱정 되는 것은 청년들이 교회를 잘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별한 주의를 여러 번 주었다. 미국 교회를 빌려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청결과 정돈과 시간 엄수이다. 그러나 올라가 보면 그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을 여러 번 발견했다. 내가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는 목사라면 문화와 풍습이 다른 소수 민족 청년들을 위해서 이런 배려를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본다. 분명히 미국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목사님은 언제나 좋을 말씀으로 답변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로써 배려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Jon Martin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 들린다.
(주후 2011년 2월 씀) |
|
|
|
| Number |
Title |
Reference |
| 41 |
‘감사 , 또 감사!’ 후기
|
|
| 40 |
감사, 또 감사! (40)
|
|
| 39 |
감사, 또 감사! (39)
|
|
| 38 |
감사, 또 감사! (38)
|
|
| 37 |
감사, 또 감사! (37)
|
목사님 댁에서 하룻밤 묶고싶습니다. |
| 36 |
감사, 또 감사! (36)
|
사역을 접으실 뻔 하셨습니다! |
| 35 |
감사, 또 감사! (35)
|
또 다시 개척교회를 |
| 34 |
감사 , 또 감사! (34)
|
크레딧 카드 번호를 드릴께요. |
| 33 |
감사, 또 감사! (33)
|
성경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
| 32 |
감사, 또 감사! (32)
|
Mrs. Ruth Brown과 김 재명 장로님. |
| 31 |
감사, 또 감사 (31)
|
'증인들의 고백' 뮤지컬 |
| 30 |
감사, 또 감사! (30)
|
언제부터 여기에서 예배 드리기 원하십니까?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