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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12장 1-20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 1:1).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혈통을 설명할 때에 아브라함으로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 구약 성경 전체에서 아브라함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를 일컬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신약 성경의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세우신 약속을 중심으로 하여(창 12:1,2)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일컬어 약속의 종교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약속하신 말씀에 기초한 종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인류 구원 사역에 중요한 시점을 마련했습니다.

역대 하 20장 7절이나 이사야 41장 8절 그리고 야고보서 2장 23절을 보면 아브라함을 일컬어 “여호와의 친구’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름 받은 아브라함의 여생에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의 신앙 성장과 경험의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친밀한 친구처럼 아브라함과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언약의 종교의 구체적인 면을 열어 주셨습니다. 봉독하신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유익한 교훈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시대는 하나님을 떠나 죄악가운데 사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 문명이 발전한 시대였습니다.
12장 10절을 보면, 기근이 심했던 시기도 있던 시대입니다.
봉건전제 군주의 막강한 권력이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잦았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성서학자인 도날드 와이스는 아브라함이 부름 받을 당시 3천여 개의 우상들이 있었고, 가장 잔인한 것은 장자를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상을 요약하면, 정치적, 경제적, 문화와 도덕적으로 매우 어려운 배경가운데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대는 어둡고 나이는 75세자 된 아브라함이 그것도 자식도 없는 사람으로써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의 종교적 배경은 우상장사였습니다(여호수아 24:2).

위의 말씀을 살펴 보면서, 우리들이 부름 받아 사는 이 세상을 잠깐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새 역사를 이룰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능력 없고, 기대할 만한 것도 없는 우리들에게 뜻을 두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사랑과 덕을 사람들이 듣고 찬양하게 하시고자 함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나타내 보이시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펼쳐 알려 주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들과 완전히 사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는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죄책감, 공포심, 불안 등으로부터 구원 받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여시고, 능동적으로 친히 뜻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약, 구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1-7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며, 그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자식도 없는데 어떻게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일가와 친척집을 떠나는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인가도 막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과 복은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는 한 개인을 부르십니다. 신앙은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주관적입니다. 하나님은 약 4천년 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늘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신앙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서 약속을 믿고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신앙의 길에 들어오셨던지,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있으셨고, 자신을 그 언약과 말씀에 복종시킴으로써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그분이 주신 거룩하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경험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말씀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담긴 경륜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동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를 때, 승리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12장 10절을 보면,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기근을 피해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크게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셔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신앙 생활을 하다가 성공적일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자만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실패했다고 낙심해서 의기소침해 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가까이 오셔서 손잡아 일으켜 주시고 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 사명감을 갖는 것 등에 부담감을 느낍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의지에 대하여 저항합니다 벌 나비처럼 그냥 살아가기를 좋아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 같은 인생을 오히려 그리워 합니다. 디트리히 본 훼퍼라는 신학자는 ‘나를 따르라”는 그의 명저에서 “부르심 그 자체가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약속과 복을 약속하신 ‘부르심’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당면한 것은 아브라함의 가나안 생활과 비슷한 심정일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을 때의 시대처럼, 문화적, 경제적, 도덕적으로 숱한 문제가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어두운 세대에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부르심이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도저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크신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와 동행하셔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12장 4절을 모면 그는 75세에 출발한 신앙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다 이해 되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늙은 나이에도 신앙은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하나님은 쓰실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은 말씀에 의지한 신앙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는 심리적 신앙, 샤마니즘적 신앙, 혼합적인 신앙 형태가 가미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며, 일시적 감정의 상태에서 자기에게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주술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7절에서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고 나누어 함께 가는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버지와 부인과 조카와 종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그의 신앙적 입장과 결단, 하나님을 의지하고 미래를 가야 할 결심에 대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함께 그들도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다가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시 하란 땅에 머물기는 했지만 결코 순례의 길을 멈추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윽고 하나님 없이 사는 가나안 땅, 강대한 7족속이 사는 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단을 쌓는 신앙이었습니다.

12장 7,8절과 13장 4, 18절을 보면, 그는 부르심을 받은 후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믿고 예배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장로는 말씀하셨습니다. E단을 쌓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그가 신앙생활에서 크게 실패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홰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단을 쌓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오는데 이 일도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이 늘 힘쓴 하나님과의 관계를 풍성하게 한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자체가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후손들도 이런 여러분의 신앙을 보고 배워 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입각한 고백적 신앙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신앙입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높여 예배하며 삽니까?
단을 쌓고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우리 각자가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Number Titl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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