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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15)
전도요원 훈련반과 박진찬 할머니
전도요원 훈련반과 박 진찬 할머니

늘 영락교회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을 극대화한 교회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회 봉사부장 시절, 교회 봉사부 모임이 있으면 꼭 부장님이나 차장님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청년회 봉사부장도 꼭 교회 봉사부 모임에 참관하라고 통보해 주셨다. 전도부장일 때도 그랬다. 가서 어르신네들이 진지하게 회의 하시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리고 회의 중에도 간간히 청년회에서 갖고 있는 의견이 있는가를 물어보셨다. 회의 가운데 어떤 안을 결정하시면서 “이 일은 청년회와 함께 진행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젊은이들이 교회의 중요한 일에 함께 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영락교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봉사 주일이 있었다. 그 주일에는 옷을 깨끗이 빨아서 가지고 오셔서 기증도 하시고, 쌀도 가지고 오셔서 통에 모으기도 하셨다. 솔직히 말해서 한 경직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목사님이 친히 보여주신 삶과 인격 그리고 교회 성도님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나누고 힘을 모으는가를 본 것들이 늘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근무했던 학교를 사임하고 그 당시로는 유일한 성경읽기 단체인 ‘한국 성서유니온’으로 옮겼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나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갖게 되었다. 꼭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 서른 세 살이 지나면 복음 전파 사역에 쓰임 받기를 기도해 왔다. 어느덧 자녀가 둘이 있게 되었지만, 안정된 직장을 떠나서 주님과 더 가깝게 동행하는 여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매일 성경’을 프로모션 하는 일과 ‘매일 성경’의 한 부분의 글을 쓰는 것이었다. 초창기 성서 유니온의 총무님으로는 윤 종하님이셨다. 기도로 업무를 시작하고 말씀 안에서, 말씀 묵상을 적용하는 일에 쓰임 받은 것을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교회나 개인들에게 어떻게 ‘Q.T’를 하는가? 왜 해야 하는가를 전하는 것이 기뻤다.
 
그 무렵, 교회에서는 ‘전도요원 훈련반’이 있어서 전도하는 교회로써 지상사명인 복음 전도의 일꾼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있었다. 2기까지 담당하셨던 목사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교회 전도부에서 나를 부르시더니, “전도요훤 훈련 제 3 기를 맡아서 강의를 하라.”는 말씀을 전도부 담당 목사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C.C.C와 네비게이토 선교회. 대학생 성경읽기 모임 등에서 영혼 구원의 훈련을 받았었다. 교회에서도 CCC에서 사역하시던 선교사님을 초청하여 전도훈련을 가질 때 훈련을 받았었다. 시간이 되면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역이나 파고다 공원 등에서 전도지를 돌리면서 전도를 해 왔었다. 무엇보다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에서 상담원 훈련 받은 일, CCC에서 개최한 ‘엑스폴로 74’때 경북에서 오신 분들 중에 한 부분을 섬기면서 지정된 강의를 한 것을 참작하신 것 같다. 그리고 한 경직 목사님께서 ‘민족 복음화 운동’을 위해서 영락교회에서 전도 운동을 하실 때, 학교에서 근무한 관계로 여러 학생들을 주님께 인도해서 전도상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떻든,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늘 그래왔듯이 순종하는 길 밖에는 없었다. 배웠던 모든 교재와 경험들을 살려서 제3기 ‘전도 요원 훈련 교재’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 타자기를 갖고 있다거나, 지금처럼 컴퓨터를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재를 펜으로 일일이 정서를 해서, 학교에서 일하셨던, 김 영배 집사님 (현재는 장로님)이 계셨던 학교에 가서 복사를 했다. 전도부에서 각 구역별로 훈련 받으실 분들을 모아 주셨다. 구역장 장로님, 권사님과 집사님 그리고 성도님들이 골고루 섞인 반이었다. 60명 정원의 반이었다. 출석은 각 구역장님이 책임지셨다. 정말 전도하는 영락교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활기찬 반이었다. 매주 2시간 가량의 시간으로 3개월 정도의 기간을 소요했다. 

첫 시간에 들어가니 연세가 드신 할머님이 등록이 안 되신 채 교실에 들어와 계셨다. 전도부에 가셔서 전도요원 훈련을 받고 싶다고 하시니, 연세가 높으셔서 힘드실 것이라고 하셔서 등록을 못했는데, 꼭 배우고 전도하고 싶으시다는 것이다. 전도부에서 하신 말씀이 이해가 가는 것은 허리가 심하게 굽으셔서 걸어가시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저도 할머님의 열성에 감탄하지만 간증문 작성 발표며, 암송이며, 사역 숙제를 해 오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난감 했다. 그러나 할머님은 계속해서 열심히 참석하셨다. 쓰는 숙제가 있어서 제출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도저히 모를 만큼 바침이 맞지 않았다.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할머님의 존함이 그 다음해에 전도상을 받으신 박 진찬 할머님이시다!

전도 요원 훈련을 받으시던 중, 교회 전도부에서 발행한 전도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결신서에 서명한 종이를 가지고 오셔서 나에게 도움을 구하셨다.
읽어보니 국회 사무처 직원이셨다. 어떻게 이 분의 결신서를 받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할머니는 남편은 오래 전에 사별하시고 딸이 하나 있지만 신세를 지지 않으시려고 혼자 사신다고 하시면서 생활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다방으로 다니시면서 껌을 파신다고 하셨다. 그 굽은 허리를 가지시고 이 다방 저 다방의 계단을 오르시며 손님 손님에게 껌을 파시는 할머니셨다.

어느 날, 어느 다방에서 껌을 파는데 일하시던 여 종업원들이 할머니를 보면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리므로 민망해서 급한 걸음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어떤 젊은 분이 정중하게 할머니께 인사를 하면서, “할머니, 제가 할머니와 말씀을 나누고 싶어서 차를 한잔 시켰습니다. 앉으시지요.”라며 부탁을 하길래 앉으셨더니 “할머니, 조금 전에 종업원들이 웃은 것은 제가 할머니를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그분들이 이해가 안 되는 듯, 웃은 것입니다. 마음에 두시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할머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할머니, 저는 껌을 파시는 할머님의 생활이 구차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껌을 파시지만 느껴지는 평안과 기쁨이 할머님께서 나타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고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저는 배운 것이 없어서 말로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왜 평안하고 기쁜지는 이 종이를 읽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신 후, 껌 가방에 언제나 넣고 다니시는 교회 전도지를 건네 드렸다. 그 청년이 진지하게 끝까지 읽더니 할머니 “저도 예수 믿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하기에 “결신란에 기입하시면 교회에서 연락을 하시게 됩니다.”라고 하니 결신서를 써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가졌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삶의 상황을 뛰어넘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한 지성인의 영혼을 흔든 것이다. 그 귀중한 결신서를 전도부에 넘겨 드리면서 연락을 부탁 드렸다. 그 분이 지금 어느 교회에선가 주님의 일꾼이 되어계시리라 믿는다.

전도요원 3기 졸업생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주일 오후에는 함께 기도하고 나서 노방 전도를 나갔다. 고궁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다니며 배운 바 대로, 개인전도도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한 여름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서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으로 사람이 사는 ‘이작도’라는 섬으로 전도여행도 다녀왔다. 교회 사정상 목사님이 가실 수 없어서 3기 졸업생 15명 정도와 함께 갔다. 공회당에 섬의 모든 어른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을 증거했다. 한 교회가 있었지만 전도사님도 없이 그냥 몇 분이 예배를 드리는 정도의 교회였다.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오후에 건장하게 생긴 해병대 장교와 사병 몇이 그 당시에는 보기 힘든 고속정을 타고 흰 거품을 그어 바다를 가르며 오더지, “여기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는데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온 사람입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대답했더니 즉시 거수 경례를 붙이며 “부탁의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라는 것이다. 저기 보이는 작은 섬에 우리 부대원들이 있습니다. 매우 외로운 곳에서 근무하는 부하들에게 말씀좀 해 주십시오.”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그 섬으로 갔다. 꼭 필요한 경비 요원만 빼고는 다 모았다고 하시면서 서울 영락교회에서 이작도에 전도하러 오신 분들이라는 소개 후에 나에게 말씀 증거의 기회를 주셨다. 군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갖는 것이 꿈만 같았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결신의 시간 초청이 있었다. 부대원 50여명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 주님을 믿기로 약속하고 영접 기도를 드렸다. 그 후에도 함께 이작도에 가셨던 대원들이 계속해서 그 부대와 연결해서 신앙을 돕고 위문도 했다. 이런 놀라운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이작도에 함께 가셔서 수고하셨던 대원들, 그리고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던 부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전도요원 훈련 3기와 4기를 마치고 나니 전도부에 담당하실 전도사님이 오셔서 맡으시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 요일 모임에 더 집중해서 사역할 수 있었고, 요일 별 모임 중요 일꾼들을 전도 요원 훈련반으로 보내어 훈련 받도록 했다. 전도요원 훈련의 기회를 주신 전도부 목사님과 정말로 훌륭하셨던 반원들에게, 미숙한 한 젊은이의 강의를 잘 들어 주시고 실습하셔서 열매를 맺으셨던 분들에게 또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1월 씀)
Number Title Reference
17 감사, 또 감사! (17) 영락 청년의 민족 복음화 운동
16 감사, 또 감사! (16) 청년아! 네가 어디 있느냐?
15 감사, 또 감사! (15) 전도요원 훈련반과 박진찬 할머니
14 감사, 또 감사! (14) 영락교회 청년회 요일별 성경공부 모임의 시작
13 감사, 또 감사! (13) 한 명으로 시작된 반
12 감사, 또 감사! (12) 큰 일 났어요.
11 감사, 또 감사! (11)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
9 감사, 또 감사! (9) 배워야 가르친다
8 감사, 또 감사! (8) 먼저 들어가, 나는 안 죽어!
7 감사, 또 감사! (7) 무덤을 다녀오시지요.
6 감사, 또 감사! (6) 오늘이 청년의 일생에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오!
5 감사, 또 감사! (5) 이 흥구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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