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감사, 또 감사 !
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7)
무덤을 다녀오시지요.
무덤에 다녀오시지요.

1963년도 5월부터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기대되는 예배였고 참석 할 때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 시에 결심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생활에 적용되거나 변화되지 못함에 대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기독교 방송도 듣고 성경을 읽어 보려고 했지만 잘 손에 잡히지 않았고 집중해서 읽게 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 경직 목사님께 12월 달에 제자리 걸음은 하는 신앙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위하여 편지를 올렸다.

목사님께서 친필로 답장을 보내주셨다. 내용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지만, 연말 연시를 당해서 바쁜 일정상 시간을 낼 수 없음에 대한 양해를 구하셨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많이 넘어진다는 내용과 함께 교육부 담당 목사님께 이야기를 해둘 터이니 가까운 시일 내에 연락을 하고 꼭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큰 교회를 담임하셔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셔야 하고, 그 외에 학교며 사회 단체에 맡으신 일들이 산적해 있는 연말에 친필로 답장을 주셨던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교회로 전화를 걸어 교육부 담당이신 이 선영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약속된 면담 시간에 교회 교육부로 가서 뵐 때, 제일 먼저 해 주신 말씀은 대학교를 다니실 때 예수님을 만난 간증의 말씀이었다. 그 후에 신앙 성장의 필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경건의 시간’에 대한 안내서가 없을 때였다. 목사님이 전해 주신 소책자는 일본 사람이 쓴 것을 번역한 성경읽기의 중요성과 간단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빌려 주시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다 읽고 돌려 드리니, 또 다른 신앙 초보자가 읽을 책들을 빌려 주셨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숙제를 내게 내 주셨다.
시간을 내어서 자주 무덤에 다녀보라는 말씀이셨다. 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망우리 공동묘지며, 4.19 묘지며 조병옥 박사 묘지 등 여러 묘지를 추운 겨울 찬 바람 부는 날 눈에 발을 빠져 가면서 다녔다. 묘지에 가서 한 가지 깊이 깨달을 것은 누구나 한 번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묘비가 있는 사람, 나무가 썩어 없어진 무덤들, 페인트로 쓴 출생 일과 사망 일등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청소년 나이에, 그리고 중년노년에 돌아가진 분들의 묘비들을 보았다. 자연히 나도 언젠가 이 차디찬 흙 속에 묻힐 것을 눈으로 그리어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답은 '살아있을 때도 바로 살고, 죽은 후에도 영원한 천국에 살아야 되겠다.' 답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책을 돌려 드리러 간 길에 무덤에 다녀온 소감을 목사님과 나누었다.

어느 날 책을 돌려 드리러 갔는데 목사님이 교회 도서관으로 전화를 걸어 주셨다. 한 청년을 소개하니 책을 빌려가서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시라는 전화셨다.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신 책 가운데서 내게 빌려 주실 만한 수준의 책을 다 빌려 주셨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도서관은 지금의 영락교회 도서관이 아니라 유년부가 모였던 ‘베다니’에서 교회 정문으로 내려 가는 곳에 있던 2층 집에 있는 긴 방에 있었다. 도서관 간사님으로는 현 윤경 권사님이셨다. 목사님의 소개를 받고 도서관을 찾아갔더니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면서 따끈한 우유 한 잔을 주셨다. 지금이야 병 우유가 흔하지만, 그 때는 서울 우유를 병으로 배달된 것으로 마시고 나면 빈 병을 수거하던 때였다. 물론 우유가 귀했고 값도 비쌌다. 난로 위에 둔 물로 따끈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대접해 주신 권사님의 사랑의 손길이 기억난다. 나중에 현 권사님의 나의 신앙 생활을 위한 기도의 어머니가 되셨고 격려자가 되셨다.

지금 기억으로는 군 대 가기 전 약 1년 반 동안 책을 많이 대출해서 읽었다. 교회 역사, 순교자들의 생애, 평신도 신학 전집 등이었다. 한 60여권을 실히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점차 신앙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한편 ‘나일선 성경통신 강좌’를 통해서 통신으로 성경을 공부했다. 요사이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나온 교재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로서는 참으로 새로웠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 권이 끝날 때 암송 숙제를 안 보고 써 보내면, 빨간색 펜으로 틀린 것들을 교정해서 보내주었다. 

나이에 맞는 성경 공부반을 찾아 간 곳은 대학부였다. 청년반에 가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런데 막상 대학부에 들어가니 문제가 있었다. 대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간단한 교복과 학교별 뺏지를 달고 다니도록 혁명 정부가 규정했을 때이다. 명문 대학을 뺏지를 단 남,여 대학생 약 30여명이 모인 반이었다. 회원들은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찾아온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문제는 반원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다. 이내 열등감이 들었다. 학교별 그룹에 들어 친밀한 관계를 유지 못하는 어색함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친절한 반원들의 배려가 동정 받는 느낌이었다. 그 반의 강사로는 연세대학교 신과 대학 신약학 교수님이셨던 문 상희 교수님이셨다. 빵 모자를 쓰셨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는데 학자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가르치시기 보다는 신학적인 것을 가르치셨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해왔고, 대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적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신앙 초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듣고 이해하기에 힘든 용어들이 적지 않았다. 학자들의 이름은 더욱 생소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 다니다가 중단했다. 

이런 과정 가운데서 학습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때마침 교회에서 처음으로 교회 각 부에서 가르칠 교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교사 양성반이 시작되어서 그 반에 참여하면서 매우 즐겁게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2011년 1월 씀)
Number Title Reference
17 감사, 또 감사! (17) 영락 청년의 민족 복음화 운동
16 감사, 또 감사! (16) 청년아! 네가 어디 있느냐?
15 감사, 또 감사! (15) 전도요원 훈련반과 박진찬 할머니
14 감사, 또 감사! (14) 영락교회 청년회 요일별 성경공부 모임의 시작
13 감사, 또 감사! (13) 한 명으로 시작된 반
12 감사, 또 감사! (12) 큰 일 났어요.
11 감사, 또 감사! (11)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
9 감사, 또 감사! (9) 배워야 가르친다
8 감사, 또 감사! (8) 먼저 들어가, 나는 안 죽어!
7 감사, 또 감사! (7) 무덤을 다녀오시지요.
6 감사, 또 감사! (6) 오늘이 청년의 일생에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오!
5 감사, 또 감사! (5) 이 흥구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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