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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타워 57호(10)
어머니처럼
난지 얼마 안 되는 아들 아이의 쌍둥이 아들을 지난 해 10월에 방문해서 보았다. 그 이후로 집사람은 늘 쌍둥이들이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였다.
그래서 3월이나 4월 중에 한번 다녀 오려고 했지만, 3월 달에는 노인 아파트로 이사하느라고 못 갔고, 4월 중에는 성경 공부 그룹의 시간과 부활 주일등으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아들네 집을 가지 못했다. 자동차로 약 10시간을 가야 하기 때문에 단단히 결심을 해야 한번 다녀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네바다 주 핸더슨에 사는 아들 집을 가려면, 모하비 사막근처로 간다. 양 옆에 아주 건조한 곳에서만 사는 선인장들과 풀들이 억지로 생명을 유지해 가는듯한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오가곤 했다.

아들 아이가 출장을 가야 하므로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화요일 새벽에 떠나서 아들 집에 도착했다. 생후 8개월이 된 쌍둥이들이 기어 다니고, 안기고 하는 것을 보니 기뻤다. 사실은 어버이 주일에 아들네가 나가는 교회도 가고 아들 아이네 식구들과 식사도 해서 뜻있는 어버이 주일을 갖고자 갔지만, 군 복무를 하는 아들의 출장이라 막을 수도 없었다. 대신 이번 어버이 주일에는 내가 쓴 미숙한 찬양 시에 곡을 붙여 주신 권 길상 장로님 내외분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내가 잠시 L.A에 살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나와 나이가 비슷하신 장로님 내외분을 만나고자 토요일 오후에 아들네 집을 떠나서 L.A에 도착했다. 권 장로님과 또 다른 장로님께서 사시는 곳이 한인 타운에서 가까운 곳이기에 윌셔 브르버드에 위치한 모텔에서 우리 부부가 하루 밤을 묶게 되었다.

원래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 온 곳은 북 가주에 있는 산호세이다. 그런데 온지 며칠 만에 다시 L.A로 이주하게 된 이유는 어머님이 내가 미국으로 오기 여러 해 전에 미국으로 오셨는데, 연세가 높으신데다가 내가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왕 미국에 왔으면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다시 짐을 싸서 L.A로 내려와서 약 1년 반을 살았다. 내려 오자 형님이 나가시는 교회에 여러 주일 나가다가, 세든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한인 루터란 교회가 있어서 몇 주일 나갔다. 그러다가 고국에서부터 잘 아는 자매님의 아버지가 미국 연합 장로교회 한인 사역 책임자임을 알게 되었다. 자매님의 아버지에게 L.A 지역에서 나갈 수 있는 교회를 소개 받고자 전화를 걸었다. 소개해 주신 교회는 윌서 연합 장로교회 건물을 사용하시어 이민 온 한인들을 돌보시는 권 희상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교회였다. 권 목사님은 그 당시 USC 병원 원목으로 계시면서 목회를 하시던 때였다.

김 목사님의 소개를 받고, 겨우 굴러가는 차를 몰고 권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를 찾아갔다. 그 때 달린 길이 바로 윌서 브루버드인 것이다. 그 교회가 위치했던 곳이 바로 내가 묶는 곳에서 몇 부럭 떨어진 윌셔와 3가에 있다. 그러므로 L.A 지역에 사는 동안 영혼의 요람이 되었던 교회를 보고 싶었다. 주일 이른 아침 우리 부부가 옛날 추억들을 이야기 하면서 잊지 못할 몇 군데를 가 보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본 것은 교회였다. 지금은 교회 마당에 들어갈 수 없게 다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서 마당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마당은 나의 일생에 한 전환점을 만들어 준 곳이었다. L.A로 내려가서 얼마 되지 않은 5월 어느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권 길상 장로님을 교회 마당에서 만나 뵙고 인사를 나눈 곳이다. 그리고 ‘나를 감동시켜 주소서”와 ‘아침에 주를 뵈어라”라는 시를 양복 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때라, 넙죽 장로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작곡을 부탁 드렸다. 초등학교 때 부른 ‘아빠하고 나하고” ‘둥근 달’등 주옥 같은 어린이 노래를 작곡하신 분의 존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장로님은 어이가 없으신 듯 하신 표정을 지으시면서 “나는 글을 읽고 감동이 되지 않으면 곡을 부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염치 없이 안 주머니에서 봉투에 든 두 편의 찬송 시를 드렸다. 그 때 이후로 장로님은 많은 찬송을 작곡해 주셨다. 그 교회와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장소요, 나의 삶에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로 계속 장로님을 뵙고 자주 연락하며, 살아온 것을 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권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어버이 주일에 식사를 나눌 수 있음도 또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아들 아이가 미국에 와서 처음 입학한 윌턴 초등학교 건물을 보면서 처음 살던 아파트를 찾아 갔다. 그 주위에 있던 아파트는 재 개발 되어 알아 볼 수 없었으나, 이민 보따리를 풀었던 그 아파트는 그 모양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그 곳에 살 때 경험했던 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 때 일을 돌이켜 보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 눈물은 지난 날에 경험한 작은 고난들에 대한 미련이라기 보다는, 가장 험하고 낮은 이곳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이 있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섬세하신 사랑의 손길에 대한 감사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바느질 공장으로 가고,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들어와 아이들이 보지 않게, 옷장에 들어가서 울며 기도했던 집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동차가 없어서 한국 상점에서 쌀을 사서 땀을 흘리면서 걸었던 길을 걸었다. 산타모니카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 취직해서 새벽에 버스를 타고가던 일, 힘들게 들어간 미국 전자회사가 문을 닫게 되어 직장을 잃고 난감해 했전 일도 생각났다. 그러나, 이제 노년이 되어 그 때 걸었던 그 길을 부부가 한가롭게 걸으면서, 바로 그 근처에 있는 모텔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정든 분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념으로 그 아파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아침 식사를 나누고, 권 길상 장로님 댁으로 갔다. 댁에서 멀지 않은 교회를 나가시기 때문에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교회를 가고 싶었다. 장로님과 약속한 시간 보다 약 30여분 빨리 도착해서 밖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장로님 내외분이 벌써 나와 계신 것이 아닌가. “왜 벌써 나오셨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우리 부부가 피곤할 것 같아서 숙소로 데리러 오시기 위해서 일찍 나오셨다는 것이다.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께서 아들 뻘 되는 우리 부부에 대한 따뜻하신 배려에 머리가 숙여졌다.

장로님과 함께 교회에 갔다. 어버이 주일이라 학생들이 가슴에 꽃을 달아 주었다. 장로님을 만난 어른들이 장로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제가 1부 예배를 드렸는데요, 장로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셨다. ‘어머니처럼’ 이라는 찬송을 1부 예배 찬양대가 불렀다는 것이다. 이 찬송을 작사한 것은 교회에서 부를 절기 찬송 가운데서 ‘어머니 주일’에 부를 찬송이 참으로 적은 것을 보고, 나를 정성 들여 키워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어머님은 여러 해 전에 이 교회에서 멀지 않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2부 찬양대를 지휘하신 장로님은 권 장로님의 대학 후배이시다. 2부 예배에서도 찬양대가 '어머니처럼'을 불러 주셨다. 모든 찬양대원들이 열심히 불러 주시는 찬송을 은혜롭게 들었다. 목사님께서 광고 시간에 오늘 부른 찬양대의 찬송을 쓴 작사자와 작곡가 부부가 오늘 예배에 참석 하셨다고 하시면서 교인들에게 소개해 주셨다. 어머님이 소천 하신 도시에서 작곡하신 장로님 내외분과 찬양을 들을 수 있을 것을 예상하고 L.A를 방문한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깊이 느끼면서 감사했다.

예배를 마치고 장로님 내외분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좋아하시는 양식집으로 갔다. 그러나, 어머니 주일이면 예외 없이 일어나는 일이 또 그 식당에도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없어서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멀리 떨어진 한가한 상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걸어가서, 한 30여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연세가 높으신 장로님 내외이시지만 건강하셔서 식사를 잘 하시는 것을 보니 참 기뻤다.
식사를 끝내니 오후 2시가 훨씬 넘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나의 삶에 깊은 계곡과 같았던 곳, 이민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좁은 길을 가야 했던 그 시절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리버티 타워’를 향하여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운전할 때 피곤을 덜어 주시기 위하여 장로님 내외분이 손수 마련해 주신 과일과 견과류를 먹으면서 집에 도착하니 오후 8시 30분 경이었다.

(주후 2011년 5월 10일 씀)

어머니처럼

1.
가진 생명 모두 아낌없이 주시고
땀과 눈물로 가라게 하신 어머니
고우셨던 손 돌보시느라 간 곳 없고
야위신 손을 애써 감추시던 어머니
그 두 손 모아 기도하심 내 안에 심겨 자라나
주의 사람 되어 순종하며 삽니다.
내게 오늘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니
험한 세상 살아갈 때 믿음으로 살리라!

(후렴)
어머니처럼, 어머니처럼 어머니처럼 살리라!
어머니처럼, 어머니처럼 어머니처럼 살리라!

2.
반항하며 홀로 이리저리 다닐 때
하나님께 도우심 구한 어머니
패인 가슴 쓰라린 상처 아파도 웃으시며
차가운 마음 따뜻이 녹여 주시던 어머니
그 고생 수고 넘은 의지 내 안에 심겨 자라나
주의 말씀 따라 제자 되어 삽니다.
내게 오늘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니
흑암 절망 다가와도 소망 안에 살리라!

3.
갈 길 몰라 그저 허송세월 보낼 때
가슴 태우며 타일러 주신 어머니
생명 바쳐 키우시느라 삭아지고
낮아지신 모습 오히려 기뻐하시던 어머니
그 바다같이 넓은 사랑 내 안에 심겨 자라나
주의 크신 사랑 배우면서 삽니다.
내게 오늘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니
고난 시련 속에서도 사랑하며 살리라!

(O.J.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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