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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27)
왜 미국에 오셨어요?
왜 미국에 오셨어요?

정든 고국을 떠나 외국으로 온 가족이 간다는 것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선망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선뜻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다. 언어며 경제적 능력이며 직장이 보장 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는 것이다. 엄청난 문화 충격과 삶의 기본적 안정이 보장이 안 된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고국의 경제 사정 때문에 ‘달라’가 부족했는지 가족 한 사람당 200불을 지참할 수 있다고 했다. 4식구가 나가니까 800불은 합법적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은 235불이 전부였다. 모임의 형제 자매님들이나 아는 분들은 나의 미국 생활에 대해 많이 걱정했다. 비행기 표는 외상으로 샀다. 매달 납입하는 제도가 항공사에 있어서 그 방법을 사용하고 미국에 와서 일해서 갚아갔다.

하와이 공항에 내리니 날씨가 매우 더웠다. 고국의 3월은 쌀쌀한 면이 남아 있어서 온 식구가 얇은 내복을 입었었는데 땀을 뻘뻘 흘렸다. 열대성 해양과 습기를 동반한 바람 때문이었으리라고 본다. 입국 심사대로 가서 입국 인터뷰를 했다. 이민 서류를 검사하면서, “얼마의 돈을 가지고 입국하느냐?”고 물어서 235불을 가지고 왔다고 하니 매우 걱정하는 눈 빛으로 그 돈을 가지고 어떻게 미국에 정착해서 살 것이냐고 물었다. 못하는 영어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7살과 5살 난 아이들이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 최선을 다 하면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약한 시간 떨어진 산호세로 왔다. 영락교회를 다닐 때 친하게 지내시던 분들이 그곳에 사시면서 우리 가족도 그 곳에 정착할 것을 권유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갈 데도 없는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약 1주일이 지나서 아르젠티나에 사시다가 거의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L.A에 정착하신 작은 형님 댁으로 아칸소 주에 사시는 누나와 어머니가 오셔서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내용은 형제들이 오래 떨어져 살았는데, 미국에 와서까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살지 말고 산호세에 정착하기 전에 L.A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 L.A로 내려갔다. 가서 청소도 하고, 햄버거 가게에서도 일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생활을 했다.

L.A에 내려가서 나갈 교회를 찾기 위해서 미국 연합장로교의 한인교회 총무로 계시는 목사님께 전화를 올렸다. 이분은 집 사람이 중병으로 힘들어 할 때 입원하도록 도와주신 소아과 과장님의 남편이 되시는 분이셨다. 윌셔에 있는 장로교회를 소개해 주셔서 갔다. 만나 뵙게 된 분은 권 희상 목사님이셨다. 해방이 되자 마자 유학생 비자 2호로 미국에 오신 분이셨다. 미국 신학교를 졸업하신 우에 하와이에 있는 한인교회와 미국 본토에 처음 개척된 한인 장로교회의 담임도 하신 분이셨다. 내가 목사님을 뵈었을 때는 이곳 대학 병원의 원목으로 계시면서 이민 오는 분들을 돕기 위해서 윌셔 교회에서 한국 분들을 섬기고 있으셨다. 사모님은 일본에서 신학교를 마치신 분이시다.미국에서는 한인 여성으로는 최초의 연합 장로교회 목사가 되신 분이시라고 한다. 목사님이시지만 이민 온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영어와 미국 역사를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다. 학교에 오는 한인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 교사를 자원하신 것이다.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사님 내외분이 올림픽 가에 있는 잘 알려진 중국집에 우리 부부를 초청해 주셨다. 목사님의 환대에 너무나 감사하면서 식사를 거의 끝냈을 때, 목사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목사님은 신학교 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질문이 평범한 것 같지만 매우 본질적인 것이었다.

“왜 미국에 오셨습니까?” 듣기는 쉽지만 답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언부언 이런 저런 이유를 말씀 드렸다. 잘 들으시더니 “미국에 오래 살면서, 여러 유학생들을 돕기도 했고, 요즈음 이민 오는 분들의 상담도 하면서 얻은 것을 알려 주겠다고 하시면서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나에 정진해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아 이곳에서 일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 돈을 열심히 벌어서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자녀들을 바로 키워 다음 세대를 세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가지고 온 돈도 없고, 돈 버는 재주도 없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여러 해를 공부에 전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어린 아이 둘을 정성드려 키우는 것이다. 일단 이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알았다. 이것이 나의 미국 생활에 한 지침이 되었다. 내가 다니던 미국 회사가 그 당시 불어 닥친 미국의 불경기로 인하여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아서 아무리 직장을 잡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어서 전자 공장이 많은 산호세에 가서 직장을 잡아야 하겠다고 결정하고 올라갔다. L.A로 내려 온지 1년 8개월만에 다시 올라간 것이다. 떠나는 날 목사님 내외분은 밤 3시까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셨지만 생활을 위해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도 감사한 것은 권 목사님의 그 질문이 내가 미국에서 우왕좌왕 하지 않고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도록 방향을 주셨기 때문이다. 참으로 친절하셨던 목사님 내외분이신데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떻던지 나와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신 분이셨다. 여러 해 후, 그러니까 1995년 정초에 집 사람이 갑자기 응급실로 가야 했다. 산호세에서 개척한 교회에서7년간 목회하고 나서 미국 젊은 선교회를 개척해서 섬기다가, 또 다른 교회 개척과 L.A 지역 젊은 선교회 개척에 대한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L.A로 이주했을 때이다. 그 당시 생활 형편이 보험을 살수 없었기 때문에, 보험 없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Community 병원인 U.S.C로 달려 갔다. 응급실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지만 정초 연휴이기 때문에 의료진이 부족했다. 응급실에는 들어갔는데 그 후에는 집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너무나 환자가 많고 번잡해서인지 보호자를 밖으로 내 보냈기 때문이다. 새벽에 들어갔는데 저녁까지 알 길이 없었다. 물어보니 병실로 옮겼다는데, 바빠서인지 병실을 알려 주지 않아 답답했다. 그냥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그런데 권 희상 목사님이 이 병원의 원목이셨다는 것을 기억났다. 물론 내가 산호세로 올라간 후에도, 다시 L.A로 내려 온 후에도 전화도 드리고 찾아 뵈었지만, 걱정만하다가 기억을 못한 것이다. 저녁 시간인데 급히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이 사정을 들으시더니 “알았다.”고 하시면서” 곧 가겠다.”고 대답하셨다. 얼마 후 목사님 내외분과 동생 되시는 작곡가 권 길상 장로님 내외분도 달려 오셨다. 나는 정말 놀랬다. 이미 병원과 목회자로서 은퇴 하신지 여러 해 되시는 목사님이 사모님과 동생 되시는 권 길상 장로님 내외분까지 연락해서 오셨다니!” 이때 나는 권 목사님 내외분과 권 장로님 내외분의 사랑이 말과 혀로 만의 사랑이 아닌 '실천되는 사랑' 인 것을 보았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젊은 후배의 어려움에 만사를 제쳐놓으시고 달려오신 기민하심과 깊은 배려에 지금도 마음 깊이 감사한다. 병원에서 은퇴 하신지 여러 해가 되셨어도 아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래서 집 사람이 있는 병실을 찾게 되었고 반갑게 만났다. 물론 목사님 내외분과 장로님 내외 분과 함께 집사람을 만났지만 아직 의료진이 큰 고통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목사님 내외분과 장로님 내외분의 방문과 협력을 받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2011년 1월 씀)
Number Title Reference
29 감사, 또 감사! (29) 또 다시 산호세로.
28 감사, 또 감사!(28) 이 글에 곡을 붙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27 감사, 또 감사! (27) 왜 미국에 오셨어요?
26 감사, 또 감사! (26)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25 감사, 또 감사! (25) 죽어도 한이 없다!
24 감사, 또 감사! (24) 거듭난 젊은이들의 대 행진
23 감사, 또 감사! (23) 기도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들.
22 감사, 또 감사! (22) 고 한 경직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21 감사, 또 감사! (21) 열악한 조건에서나, 최상의 조건에서나
20 감사, 또 감사! (20)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19 감사, 또 감사! (19) 계단에 스셔서 손을 흔드시던 목사님
18 감사, 또 감사! (18) 산에 나무를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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