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감사, 또 감사 !
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23)
기도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들.
기도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들.

카나다로 이민 가시는 장로님이 나를 만나자고 하셨다. 장로님께서는 “이 집사,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신학교에 가는 것이 어떤가?”를 물으셨다. 그러시면서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이 집사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사람이 있으면 장학금을 주라고 남겨 두신 돈이 있다고 하셨다. 이 집사가 신학교 갈 때 장학금으로 지급하시도록 교회 어느 분께 맡기고 가니 그렇게 알라고 하셨다. 그 다음해 맡으신 분께서 부르시더니 “신학교를 가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시기에 머뭇거렸다. 사실 집 사람은 공무원으로 있다가 아이가 둘이 되자 퇴직을 했다. 그러니 내가 벌어야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장로님이 맡겨놓고 가신 장학금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셔서 신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학기는 장학금을 받아서 잘 지냈다. 그런데 둘째 학기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꼭 공부를 잘해야 받는 장학금이 아니라 지정 장학금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한 학기 하고 성적을 평가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성적표를 제출하라는 말씀도 없으셨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그 이후로는 받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그분을 찾아가서 여쭈어 볼 수 있을 용기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이럴 바에야 구세군 사관학교를 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들으니 구세군 사관학교는 학비가 없고, 부인도 함께 공부시키고 자녀들 교육도 책임져 주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말이 귀에 솔깃했다. 

그런데 저를 잘 아시는 권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매우 힘든 것을 눈치 채셨다. 나는 어느 한 분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어느 날 집사람이 돈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이 봉투가 어디서 난 것인가를 물으니 아는 권사님께서 아들은 걸리고, 딸 아이는 업고 교회에서 나오는데 억지로 가방에 넣어 주신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권사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이 집사를 위해 모여 간단히 기도하고 모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꼭 필요한 곳에 쓰라.”고 당부하셨다. 매 달 나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정성을 모아서 나의 생활과 학비를 대 주신 것이다. 그런데 장학금을 주시겠다고 하셨던 분을 교회에서 만나면 “이 집사, 신학교 공부 열심히 하시지요?’”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위해서 기도로 물질로 후원해 주신 분들은 이제 대 부분 소천 하셨을 것이다. 대표되는 권사님만 알지 누가 저를 위해서 모인다는 말씀이나 어디서 모이신다는 말씀을 해 주시지 않으셨다. 내가 미국으로 올 때, 후원자님들이 너무나 고마워서 기독교 서점에 가서 ‘기도하는 손’ 그림을 사서 기도와 학비로 후원해 주신 분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약 15년 전에 같은 교단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신 분이 내가 영락교회 고등부에서 교사로 있을 때 학생이셨던 분이시다. 약 20여 년 만에 만났지만 서로 반갑게 알아 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사모님 말씀이 어느 날 어머니가 기도하는 손을 벽에 붙이시기에 “누가 주신 것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내가 후원하던 전도사님이 미국으로 가시면서 주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사모님과의 대화에서 어머님이 후원하던 전도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아셨다. 사모님의 모친 권사님은 연로하시지만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 기도와 학비로 후원해 주신 어머님 아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신학교 앞 2층에 위치한 방 하나를 얻어서 4식구가 살았다. 겨울에는 어린 아이들이 있었지만 할 수없이 연탄 난로 하나를 놓았다. 그것으로 밥이며 국이며 아이들 목욕물 등을 다 해결했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지만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매년 명절이면 영락교회 교사 양성부와 청년부 시절에 배웠고, 모셨던 박 창환 교수님 사택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세배를 드렸다. 교수님이 아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현 수삼 사모님을 알게 되었는데, 신학교 부설 유치원 원장님이셨다. 사모님은 신학생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시면서 아주 싼 학비를 받으시면서 아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박 창환 교수님은 헬라어와 신약학을 가르쳐 주셨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특강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한 주 동안 ‘주기도문 강해’를 헬라어를 공부하면서 해주신다는 것이다. 수강료는 없으니 원하는 학생은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공부는 잘 못하지만 열정은 있어서 꾸준히 참석했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냉방도 되지 않던 시절이다. 교수님은 땀을 흘리시면서 열심히 헬라어를 써 가시면서 강해를 해주셨다. 지금 그 때 가르쳐 주신 것을 거의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교수님의 열정 어린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일생에 목회자로서는 한 경직 목사님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학문의 깊이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박 창환 교수님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성경 공부에는 배 사라 선교사님을 어찌 잊겠는가. 강의시간에 박 창환 교수님은 “나는 학문적으로 깊이가 없다. 헬라어도 거의 독학을 하다시피 했다. 한 줄을 가지고 한 두 주일을 씨름해서 알아냈다.”고 하시면서 “빨리 여러분 가운데 학자가 나와서 나 같은 사람은 강단에서 떠나야 할 것”이라는 겸양의 말씀을 하셨다. 교수자리 얻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수업 시간에 누군가가 여쭈어 보았다. “교수님은 일생에 몇 권의 성경을 바꾸셨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교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저는 헬라어 성경으로 묵상하고 공부하는데, 다 낡아지면 바꾸기를 일곱 권째 했고 지금 여덟 권째 헬라어 성경으로 묵상하신다.”고 하셨다. 정말 존경스럽다. 지금 고령이신데도 선교지에 가셔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지금도 교수님과 연락하고 있다.

어느 날 기독교 교육학을 가르치시던 주 선애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주 교수님은 영락교회 교사 양성부 시절에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시고, 교회 주간학교 교장님으로 계실 때 시간을 내서 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아드님이 고등부 때 내 반인 적이 있어서 댁으로 심방을 간 적도 있었다.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셨다. 상대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시는 분이시기도 하셨다. 기독교 교육 강의 시간에 “저는 기독교 교육학을 가르치지만, 날이 갈수록 신학적인 배경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신학을 공부하고 계시니, 여러분 가운데서 기독교 교육 전문가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요지의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참으로 겸손하신 교수님이셨다.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 당시 신학교 교수님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바자회를 개최하시게 되었다. 교수님이 저를 보시더니 “부탁이 있다.”고 하셨다. “너무 바쁘기도 하고, 바자회에 내놓을 물품이 마땅치 않아 전도사님 사모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다.”고 하셨다. 집사람은 서양 매듭을 잘 했다. 벽 걸이, 화분 걸이, 가방 그리고 매듭 등 같은 것들을 만들 수 있었다. 교수님이 집 사람에게 매듭을 부탁하신 이유는 사실 다른데 있으셨다. 물건을 만들기 전에 재료비도 주셨다. 부탁하신 것을 다 만들어서 드렸더니 “너무나 예쁘게 만들어서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과분한 수고료를 주셨다. 사실은 어렵게 공부하는 나와 가정을 돕고 싶으셔서 일을 만드신 것이다. 이런 따뜻한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 할 수 있었음에 지금도 감사한다. 

기도로 학비로 후원하신 어머님들과 아버님들, 제자들을 사랑하신 교수님들 그리고 제자의 삶에 힘이 되어 주셨던 스승님들의 은혜에 늘 감사한다. 나도 이런 분들처럼 일꾼을 세우고, 제자를 사랑하고, 남의 어려움을 살펴 돕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또 해본다. 

(주후 2011년 1월 씀)
Number Title Reference
29 감사, 또 감사! (29) 또 다시 산호세로.
28 감사, 또 감사!(28) 이 글에 곡을 붙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27 감사, 또 감사! (27) 왜 미국에 오셨어요?
26 감사, 또 감사! (26)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25 감사, 또 감사! (25) 죽어도 한이 없다!
24 감사, 또 감사! (24) 거듭난 젊은이들의 대 행진
23 감사, 또 감사! (23) 기도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들.
22 감사, 또 감사! (22) 고 한 경직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21 감사, 또 감사! (21) 열악한 조건에서나, 최상의 조건에서나
20 감사, 또 감사! (20)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19 감사, 또 감사! (19) 계단에 스셔서 손을 흔드시던 목사님
18 감사, 또 감사! (18) 산에 나무를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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