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감사, 또 감사 !
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25)
죽어도 한이 없다!
죽어도 한이 없다!

신학교를 다니며 젊은 선교회를 섬기니 집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집 사람은 “당신은 청년들과 결혼했다.”는 완곡한 말로 불만을 말하곤 했다. 몇 회 전 글에 가정 경제 사정에 대해서 이미 기록했기 때문에 다시 쓰지 않겠다. 아이들의 의복비를 줄이기 위해 뜨개질을 많이 해서 아이들을 입혔다. 어느 날 부터인가 소화가 안 된다면서 힘들어 하기를 여러 달 지났다. 그 당시로서는 경제 사정상 병원 방문이 힘 들던 시절이기 때문에 정기 검진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배가 아프다고 하니 약방에서 소화제만 사다가 주었던 것이다. 마침 박 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라 공휴일이었다. 그날 밤, 집사람이 아픈 배를 움켜 잡고 딩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아래 층에 내려가 주인 아저씨를 깨웠다. 사정을 아뢰니 돈을 꾸어 주셨다. 자는 6살과 4살짜리 아이들이 자는 것을 뒤로하고 집 사람을 업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통금이 없는 날이기 때문에 택시가 다녔다. 아이들이 아프면 갔던 서대문 로타리에 있던 적십자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수속을 하고 응급실로 갔지만, 그 당시의 병원 시설은 지금에 비해서는 열악했다. 담당의사가 E.R 담당 전문의사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생각에도 수련의 라는 생각이 든다. 아파서 딩굴고 울면, 의료비 수납실에 가서 주사비를 지불하고 오라고 해서 다녀 오면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여기서 있다가는 집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인 아저씨가 빌려 주신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병원에서 집사람을 다시 업고 나와서 택시를 타고 서울 대학 병원으로 갔다. 그때 서울 대학 병원을 신축하고 있던 때였는데, 수위에게 응급실을 물으니 공사 중이라 잠시 폐쇄 되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을 물으니 우석 대학 병원이 있다고 가르쳐 주어서 그 병원으로 달려 갔다. 적십자 병원 보다는 나았지만 야간에 환자를 돌 볼 수 있는 의사가 참으로 부족했다. 거기서도 돈을 내고 주사를 맞았지만, 그 “병원에서 놓아줄 수 있는 진통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을 놓아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며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입원하라.”는 것이다. 집 사람의 얼굴 색깔은 점점 검어가고 혀는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이 되니 병실로 갈 사람은 가고, 사정상 갈 수 없는 사람은 병원에서 나가야 했다. 그 당시는 의료 보험이 없던 때라 돈이 없으면 그냥 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원에서 의료비를 댈 수 없으면 내 보냈기 때문이거나, 아예 받지 않아서일 것이다. 집사람을 업고 병원 로비를 나왔다. 집사람을 의자에 뉘어 놓고는 난감했다.

그래도 살려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도하다가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돈이 있어야 입원을 하는데 먼저 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영락교회 청년 모임에서 친하게 지냈던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가서 돕고 싶지만, 가진 현금이 없어서 은행이 열리면 찾아서 곧 가겠다.”는 것이다. 그분은 당시 거여동에 살았다. 오전 9시에 여는 은행을 들려 돈을 찾아서 우석 병원까지 오려면 교통체증이 심하던 시절에 얼마나 걸릴지 난감했다. 집사람은 호흡이 힘들어 지는 것 같았다. “다른 길이 없겠느냐?” 고 하니 잠시 후에 전화를 달라고 했다. 조금 후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내가 지난 회에서 언급하신 집사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 우석 의대 학장님이시라 도움이 가능할 것 같아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부인되시는 여 집사님께서 출근하시는 남편에게 말씀 드렸더니 “도와주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병원으로 전화를 거셨다는 것이다. 그 전화를 받고 집 사람 옆에 앉아 있으니 조금 있다가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다가와서 내 이름을 부르며 “의대 학장님을 아시느냐?” 물으면서 입원 수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입원 수속을 위해 창구에 갔다. 이야기를 하니 담당자는 “내가 직접 받은 말씀이 없어서 할 수 없다.”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다시 앉아서 기도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집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한 분 생각이 났다. 서울 음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는 분 가운데 한 분이 제 1회 젊은 선교회 수련회에 참석했었다. 그분의 어머님은 종합 병원에서 소아과 과장님으로 계셨다. 아버님은 목사님으로 미국에 계셨다. 한 번 자매님 댁에 가서 어머님을 뵌 적이 있었다. 공중 전화통에 가서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알렸다. 아직” 어머님이 출근 직전이시라고 하면서 어머님께 사정을 말씀 드리겠다.”고 했다. 어머님이 사정을 들으시고는 “도와야 하겠는데, 들으니 외과 수술이 필요한 병인데, 병원 외과 과장과 의논해서 알려 주시겠다.”고 하셨다고 하신다. 돈이 있으면 택시 타고 가면 되겠지만 경제적인 것을 감안한다면 외과 과장님의 결정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사람을 데리고 가면 그 때는 이미 생명이 없을지도 모르기에 “오라.’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있다가 전화를 걸으니 외과 과장님이 구급차를 보내겠다고 하시면서 쾌히 승낙 하셨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거여동에 사는 청년 동역자가 나를 만나러 병원으로 달려왔다. 집 사람이 응급 차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집 사림이 퇴원한 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어떻게 그런 응급한 환경에서 그렇게 평화로운 얼굴을 할 수 있었느나?’고 했다. 나는 그냥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의 마음은 괴롭고 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얼굴에 평화가 있었다니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교통 체증이 심하던 때라 예상시간보다 늦게 차가 도착했다.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차도를 가득 메운 차들이 비켜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병원에 들어가 응급실로 들어가 응급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병원의 진료 기계들을 다 동원해서 촬영을 해도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과 과장님의 경험상 의견으로는 담낭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지만, 무턱대고 수술을 시도하실 수가 없어서 계속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찾으려 하셨지만 안 되었다.

그날 하루 낮을 지내고, 소아과 과장님의 부탁으로 그 당시 국립 의료원에 계신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밤새도록 사진을 찍어 문제된 것을 발견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소아과 과장님과 외과 과장님은 밤 잠을 못 주무시고 시간시간 결과를 보고 받으셨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단안을 내리셔야 했다. 이제는 수술을 해서 직접 복부를 열어보고 문제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가정 집에 전화를 놓으신 분들은 정말 여유 있는 분들이었다. 김포에 사시던 장모님께 연락도 못했다. 만일 수술 하다가 환자가 죽어도 보호자가 책임을 진다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내 소식을 들을 젊은 선교회 자매님이신 조 성남 자매님이 내 아들 딸을 돌보아 주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때에 아들 아이는 소아과 과장님 댁에서 맡아주셨고, 딸 아이는 파주에 사는 이모네 댁으로 보냈다. 드디어 집 사람이 개복 수술을 해서 병을 찾아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날이 12월 30일이었다. 정말로 여러 형제 자매들이 직장이 바쁜 연말이지만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집 사람의 베드를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겼다. 병원에서는 어떤 저명 인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문병을 오신 분이 많았다. 수술 결과는 외과 과장님의 예상처럼, 담낭의 문제였다. 담낭이 다 썩어서 정구 공 만해 졌는데 터지기 직전에 수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물을 넣고 아무리 시험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담낭의 기능이 없어져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이 터지면 간과 모든 중요 기관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것이다. 수술 후에 집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수술실에 들어갈 때 마음에 참 평안이 있었고, 형제 자매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죽어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가득 찬 가운데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날을 입원한 후 퇴원 할 날이 다가왔다. 문제는 수술과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내 사정을 잘 아시는 소아과 과장님이 병원 측과 의논하여 많이 삭감해 주셨다. 그래도 무일푼인 나에게는 답이 없었다. 내 사정을 아는 젊은 선교회 회원들과 영락교회 청년회원들이 힘을 모았지만 그래도 모자랐다.
그런데, 집사람이 우석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신 의대 학장님의 부인이셨던 집사님이 입원비를 도우셨다. 그래서 수술비와 입원비를 다 갚고 약간의 돈이 남아서 집 사람의 퇴원 후를 돌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 집사람은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미국에 이민 온 후에도 중병으로 3차례 입원한 적이 있지만, 이곳은 일단 보험이 없더라도 응급실로 가면 치료가 시작되고 생활 형편을 고려하여 조금씩 갚으면 되는 제도가 있어서 고국같이 힘들지는 않았다. 3년 전 유방암 수술도 받고, 5년 전에는 중풍이 지나가기도 했고. 간 근처의 어느 관이 막혀 수술도 받고. 담낭 수술 후 잘라낸 부분에 조금씩 분비물이 20여 넌 이상 끼어 큰 돌이 생겨 또 응급실로 들어가 돌을 제거하는 치료 받았다. 그래도 지금은 열심히 운동하면서 긍정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삶에 대하여 감사하게 살고 있다.

집 사람이 오늘날 나와 함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소아과 과장님의 사랑에 감사 드린다. 어머님께 딱한 사정을 알려 도움을 받게 한 자매님께 감사한다. 이분은 미국과 프랑스에 가셔서 유학을 끝내시고 미국에서 음대교수로 일하고 계신다. 어머님도 미국에 사신다. 지금도 소아과 과장님과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락을 드린다. 당시 수술 하셨던 외과 과장님을 이민 오기 전에 인사를 드렸다. “외국에 가서 건강히 살라.”는 말씀과 덕담을 주셨다. 우석 의대 학장님의 부인이셨던 집사님이 생존해 계신지는 모른다.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 뵈면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영락교회 청년들과 젊은 선교회 형제 자매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주후 2011년 1월 씀)
Number Title Reference
29 감사, 또 감사! (29) 또 다시 산호세로.
28 감사, 또 감사!(28) 이 글에 곡을 붙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27 감사, 또 감사! (27) 왜 미국에 오셨어요?
26 감사, 또 감사! (26)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25 감사, 또 감사! (25) 죽어도 한이 없다!
24 감사, 또 감사! (24) 거듭난 젊은이들의 대 행진
23 감사, 또 감사! (23) 기도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들.
22 감사, 또 감사! (22) 고 한 경직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21 감사, 또 감사! (21) 열악한 조건에서나, 최상의 조건에서나
20 감사, 또 감사! (20)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19 감사, 또 감사! (19) 계단에 스셔서 손을 흔드시던 목사님
18 감사, 또 감사! (18) 산에 나무를 심자!
Page: (2/4), Total: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