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감사, 또 감사 !
오늘 제가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갖은 실패와 풍파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제 삶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에 얽어매어 지탱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도록 빛을 발하는 삶을 사신 분들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어두움을 인내로 참아내며 두려움에 싸여 떠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자기 희생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셨음을 새삼 느낍니다.

저의 짦은 삶이 얼룩짐과 넘어짐과 죄 많은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분들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아낌없는 도움과 격려와 사랑을 받게 하셔서 오늘에 이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직 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기억나는 모든 분을을 기록할 수는 없어도 감사, 또 감사함을 글로 남겨야 하겠다는 부담감을 연말에 강하게 느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에 생수처럼 다가오신 분들, 별 빛처럼 영롱한 빛을 남기신 분들 그리고 쉴 그늘이 되어 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충고해 주시며 아낌 없는 사랑을 베푸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呼泉(호천) 李興九(이 흥구)
감사, 또 감사! (19)
계단에 스셔서 손을 흔드시던 목사님
계단에 스셔서 손을 흔드시던 목사님.

고등부 교사를 할 때 주일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는 고등부 예배를 늦지 않기 위해서 다른 날 보다 더 부지런해야 했다. 아이들을 깨워 세수시키고 옷을 입힌 뒤에 유년부 교사를 했던 집사람과 버스를 30-40분 정도 타고 을지로 2가에서 내려서 아이를 업고 뛰어 교회학교 예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달려야 했다. 특히 추운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은 늦을까 봐 조바심을 가졌다. 

그 당시에는 교회 본당에서 고등부 예배를 드렸다. 고등부 학생이 참 많이 모였었다. 교회 정문을 통과해서 본당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다 보면 꼭 만나는 분이 있다. 담임 목사님이신 한 경직 목사님이셨다. 외국에 나가시거나 출장 가신 날 외에는 어김 없이 교회 계단에 서계셨다. 늦은 교사나 학생을 꾸짖기 위함이 아니다. 계단에서 본당을 향해 올라오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기뻐 맞으시며 “수고 하십니다.”라는 말씀을 주셨다. 계단 앞을 지나서 교육관이나 베다니로 가는 초등부나 유년부 학생과 교사들을 향해 손을 흔드셨다.

나는 목사님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참 모자상을 보았다. 존경하는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다. 겨울에는 어떤 장갑을 끼셨는가도 살펴 보았다. 외국에 많이 나가시는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좋은 가죽장갑을 끼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짠 장갑이었다. 아마도 손녀 따님이 짜주신 것인지, 교인이 드린 선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로 짠 장갑이다. 비 오는 여름이면 우산을 쓰셨고, 추운 울에는 털 모자를 쓰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손을 흔드신 목사님이셨다. 참으로 다시 보고 싶은 모습이다. 한 목사님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오산학교를 다니시면서 민족의 선각자이셨던 남가 이 승훈 선생님과 고당 조 만식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다. 

내가 한 목사님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참된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한 목사님의 고학생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셨다. 이 지면을 통해서 목사님이 박봉을 가지시고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의 가난에 동참하셨던 것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읽으실 분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 당시 영락교회 본당 근처에 작은 함이 있었다. 그것은 고학생들을 위한 모금함이었다. 그 당시 아무리 가난한 때라고 해도 그 함을 떼어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한 번은 평신도 부 간사님께서 그 함을 가져와 계산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본당 외부 벽에 있던 함을 가져와서 함을 열었을 때, 깜짝 놀랐다. 그 안에 아주 작게 꼬기꼬기 접은 돈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 돈 가운데는 전시에 배우지 못한 아픔을 가진 분들의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고학을 하면서 고생하신 분들이 눈물과 감사와 함께 십시일반으로 모으고자 하는 정성이 담겼을 것이다. 모금함에 헌금하신 분들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분들이 낸 정성의 따뜻한 손길은 지금도 나의 손 끝에 있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시다.
젊은이들은 힘차고 추진력을 있을지 몰라도 미숙하고 거칠다.

교회 학교 교사들이 담임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교사들은 목사님을 만나고 싶으면 계획에도 없는 부탁을 드리곤 했다. 어떤 때는 몇 번씩 드리는 주일 대 예배를 드린 후에도 목사님을 뵙고자 할 때도 있었다. 나 같으면 피곤하다고 뒤로 미루었을 것 같다. 그러나 한 목사님은 혼신을 다하셔서 설교를 여러 번 하신 주일 오후 일지라도 기꺼이 응해 주셨다. 피곤하신 기색이 있으셨지만 기쁨으로. 
한번은 청년회 임원들이 북한 선교에 대한 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우리들이 아는 바와 같이 목사님은 매우 바쁘신 일정을 소화하셔야 할 분이셨다. 교회는 물론, 학교와 사회 단체 또는 국가 기관에 이르기 까지 목사님이 하셔야 할 일이 많으신 분이셨다. 그래도 목사님의 꿈 나무는 청년들이셨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아무리 바쁘셔도 청년들의 부탁을 뿌리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목사님에 관한 글들을 읽으니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찬송으로 하루를 시작하신다고 하신다. 밤 내일 맡겨지신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밥 10시에는 꼭 주무셔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청년회 임원들이 북한 선교에 대하여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 여러 가지 바쁘신 일이 있으셔서 저녁 8시30분 경에나 시간이 나신다고 하셨다. 그래도 청년 임원들은 목사님을 뵙고 싶었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승낙 하셨고. 하루의 고됨을 잊으시고 매우 진지하게 교육관에 있는 한 방에서 말씀을 해주셨다. 그 날은 10시에 주무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내가 목사가 되어서 늘 인생의 스승으로 삼으시는 목사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들을 따르고 싶어했다. 청년 임원 때 이런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목사님께 전화를 걸면, 부재중이시기 때문에 말씀 드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사모님께자 사무실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면 어김 없이 전화를 걸어 주셔서 우리들의 부탁을 들어 주신 자상하신 목사님이셨다. 내가 목회자가 되니 작은 일에 충성한다는 것, 어린 소자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것, 사람들에게 할 말을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면서 목사님이 보여 주신 본에 감사를 드린다.

(2011년 1월 씀)
Number Title Reference
29 감사, 또 감사! (29) 또 다시 산호세로.
28 감사, 또 감사!(28) 이 글에 곡을 붙여 주실 수 있으신지요?
27 감사, 또 감사! (27) 왜 미국에 오셨어요?
26 감사, 또 감사! (26)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25 감사, 또 감사! (25) 죽어도 한이 없다!
24 감사, 또 감사! (24) 거듭난 젊은이들의 대 행진
23 감사, 또 감사! (23) 기도해 주신 어머님과 아버님들.
22 감사, 또 감사! (22) 고 한 경직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21 감사, 또 감사! (21) 열악한 조건에서나, 최상의 조건에서나
20 감사, 또 감사! (20)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19 감사, 또 감사! (19) 계단에 스셔서 손을 흔드시던 목사님
18 감사, 또 감사! (18) 산에 나무를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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