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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외에는.
월남 참전 수당
뉴 저지에 있을 때에 월남전에 참전하셨던 교우가 있었다. 그분의 말씀에 만 65세가 넘은 월남 참전 용사들에게는 매월 대한민국 보훈처에서 수당을 준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고국도 이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나라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했었다. 1967년 파병되어 약 1년 반을 복무하고 귀국해서 제대했다. 보훈처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안내문을 읽고 서류를 써서 보내기 위해서 용지를 프린트했다. 써야 하는 칸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깜깜한 것이 여러가지가 있었다. 자신 있게 쓸수 있는 것은 군번과 본적지 밖에는 없었다.

군에 입대한 정확한 월일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월남으로 파병된 정확한 날짜며 귀국한 날이며, 제대한 날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만 65세가 훨씬 넘어서 보훈처에 매월 수당을 신청한 이유는 나의 생활에 조금 보태기 위한 동기가 아니었다. 내 주장은 고국에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고국의 돈을 적든 많든간에 미국으로 내 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 올 때에, 정부에서 허락한 외화 지참액은 가족 일인당 이백불이었다. 참으로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 고국이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있는 나라가 되었어도, 우리나라가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외 조카 가운데 하나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누나는 중학교 다닐 나이에 육이오 사변을 맞았다. 수복이 되어 돌아와서도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가정 형편이 못되었다.

사변 초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뿔뿔이 흩어져서 피난을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가족이 모였지만 맨 위에 있는 두 분의 형님은 군대에 있고, 불에 전소한 터에 땅을 파고 온 식구가 움막에서 살아야 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시장에 나가서 장사도 하고, 공장도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아는 분의 짒에 가서 일해 주면서 살아야 했다. 온갖 고생을 한 큰 누나가 결혼을 해서 양평으로 가셨다. 마음씨 좋은 큰 누나가 시집가고 떠난 날 매우 허전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첫 아들을 나신 누나가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서울로 이사오셨다. 가정 형펀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용돈을 타서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그러니 돈이 필요하면 가끔 누나네로 놀러 갔다. 갈 때마다 귀한 쌀밥에 내가 좋아하는 어리굴젖을 가게에 가셔서 사다가 맛있게 먹고 가도록 해 주셨다.

그뿐만 아니다. 내가 누나네 집을 나올 때면, 언제나 돈을 돌돌 말아서 호주머니에 쑥 넣어 주시곤 하셨다. 철 없는 나는 누나의 집이 겨우 생활을 하실 형편인데도 받았고, 기분 좋아했다. 큰 누나는 아이들을 낳으신 후 바느질을 하시면서 열심히 가사를 도우셨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셔서 내가 미국에 온 이후에 중풍에 걸리셔서 여러 해 동안 반신 불수로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사용하는 사무실에 있는 작은 냉장고 위에 예쁜 그림을 배경으로 하고 써 있는 이런 글이 있다. People may forget what you said or what you did, but they will never forget how you made them feel. 어떻게 외조카를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신청하면 탈 수 있는 월남 참전 용사 수당을 조카에게 매달 전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 사람과 의논을 하니, 집 사람도 매우 좋게 생각했다. 알아 보았더니 내가 고국에 있는 사람에게 보낼 구좌 번호를 주면 그 쪽으로 입금이 된다고 한다. 너무나 고마운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밝혔듯이 보훈처가 알고자 하는 내용을 다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고국의 경기도에 있는 보훈처에 전화를 걸었다. 친절하게 받아주신 분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민을 떠나시기 전에 어디에 살았느냐?"고 물었다. "서울 성동구 광장동"이라고 대답했더니 내가 서류를 내야 할 곳은 서울 보훈처에 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황선영'선생님이 담당자라고 알려 주셨다. 그래서 황선영 선생님에게 나의 군번과 본적지와 이름을 적은 서식과 함께, 도움을 청하는 간곡한 글과 함께, 내가 보내고자 하는 곳으로 수당을 보내 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약 한달 반 만에 대한민국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다. 모든 서류가 잘 접수되었고, 심사 결과 수당이 지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훈처 담당해 주셔서 수고해 주신 황 선생님에게 너무나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얼마나 친절한 분인가! 내 이름과 군번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사해서 기록해 주셔서 서류를 완성해 주신 것이다. 정말로 넘치는 수고에 따른 은혜를 받은 것이다. 국민을 이름 없이 섬기는 이런 공직자들이 있음에 고국이 자랑스럽다. 편지를 받고 너무나 감사해서 서울 보훈처로 전화를 해서 황선영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기쁘게 받아 주신 후에, 수당은 제가 접수한 날을 기준으로해서 서류 처리 기간을 합하여 2012년 1월 15일부로 네 달치가 조카 구좌로 입금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이곳 날자로 오늘이(고국에는 어제) 외조카의 구좌로 처음 수당이 입급되는 날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조카에게 조그마한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월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한데, 고국 정부에서 보상해 주며, 그것이 나를 격려해 주셨던 큰 누나의 아들에게 가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후 2012년 1월 15일)
Number Title Reference
10 왜 안오셨어요? (2) 오클랜드 한인 연합 감리교회를 다녀와서
9 왜 안오셨어요? (1) 오클랜드 한인 연합 감리교회를 다녀와서
8 '이 이흥구가, 그 이흥구냐?" 영락교회 작곡가들의 수고에 감사.
7 제 10 회 '감사와 찬양의 밤'(2) 모임을 위하셔 준비하신 최창경 사모님에 대한 감사의 글
6 제 10 회 '감사와 찬양의 밤'(1) 모임을 위하셔 준비하신 최창경 사모님에 대한 감사의 글
5 군번 외에는. 월남 참전 수당
4 ‘Uncle John’ 목사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3 어버이 주일 날에 친 딸처렴 우리 부부를 돌보아 주는 자매님.
2 Double ‘J’ 집사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부부.
1 감사, 또 감사!(2)를 쓰면서 2007년 이후에 만난 또, 감사한 분들에 대하여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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