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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타워 57호(7)
젊음과 늙음이 교차하는 곳
내가 살게 된 노인 아파트는 산타 크라라 대학교 옆이다. 동쪽으로 한 브록만 가면 된다.
그래서인지 대학교 주변의 주택들은 거의 다 대학생들이 세를 들어 산다. 내가 사는 57호실에서 약 200 메타 떨어잔 남쪽에는 우리 자녀 둘이 졸업한 중학교가 있다. 이 북서 중학교는, 우리 가정, 특별히 아들 삼열이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셨던 일이 있는 학교다.

삼열이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역사 선생님이신 Mrs. Wilcox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주셨다. 삼열이에 대하여 의논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들 아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하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아주 얌전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의외의 전화인 것이다. 선생님은 삼열이를 관찰한 결과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씀이셨다. 그 당시 우수한 학생들을 위한 GATE 크라스가 있는데 그 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험이 필요한데, 학부모의 동의를 받고 싶다고 하셨다. 국민학교 때까지 ESL 크라스에 다니던 아들 아이이기에 학교에서 학과라도 잘 따라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았고, 기쁘게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삼열이에게 좋은 역사 선생님을 만난 것, 한 아이의 학업에 관심을 보이신 선생님의 배려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못 본 선생님을 통하여 앞으로 삼열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값진 삶을 살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요즈음 매일 아침과 저녁 우리 부부가 그 학교 옆을 지나서 걷는다. 학교 건물을 보면서 늘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걷는다.

아침과 저녁 걸을 코스를 정하기 위해서 처음 한 2주 동안은 이 길 저 길을 다녀 보았다. 처음에는 산타 크라라 대학 캠퍼스를 걸었다. 수녀 크라라의 동상도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캐톨릭 성당이 있는 유서 깊은 사립 대학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걸었다. 학교 주위에 있는 주택가도 그렇지만. 기숙사 건물이 여러 동 있고, 체육관이며 각 학과 건물들에는 늘 젊은 학생들로 붐볐다. 그들을 보면, 세상이 다 젊은이들로 구성된 듯 착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원 바로 넘어에는 캐톨릭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다. ‘리버티 타워’에는 얼마 후면 주님께 갈 노인들이 일색이지먄, 한 발자국만 건물 밖으로 가면, 새 새대의 신섬함이 몸에 와 닿는다. 병원에 가면 세상 사람들이 다 병자인 듯한 인상을 갖는 것처럼.

이 지역은 캘리포니아의 캐톨릭 미션의 거점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하나이다. 이곳에 온 신부들도 있을 것이다. 산타 크라라 외에도, 갤리포니아 지역의 캐톨릭 미션에 대단히 공헌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주후 1777년 프란시스칸 신부인 Junipero에 의하여 지금도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교회당이 세워졌다. 이 교회당은 지금도 대학 캠퍼스 안에 있다. 유명한 신부요 산타 크라라 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이 된 제수잇파 신부인 John Nobili도 있다. 그들에 비하면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영향을 받고 하나님께 헌신했던 한 수녀로 섬겼던 분의 이름이 이 학교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대학이 크라라 수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까? 왜 내가 사는 도시의 이름이 산타 크라라일까? 실리콘 밸리와 기타 중요한 과학 첨단 문명을 이끌어가는 기술 도시를 가지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중 중요하다고 할 만한 카운티의 이름이 왜 산타 크라라인가?

그 분의 동상은 대학교에도 있고, 산타 크라라 시청 앞 분수대에도 있다. 얼마나 그 분의 실제 모습과 같은지는 모르나, 그냥 가냘픈 한 여성이다. 산타 크라라 대학 내에 있는 동상을 보면, 애절한 마음이 드는 야윈 손과 얼굴이다. 체구도 결코 큰 분 같지는 않다. 그분의 손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쓰여진 것을 상징하는 듯이 손을 앞으로 뻗어서 조금 위로 하고 있다. 그분의 섬김의 손은 사람들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그 무엇, 지워지지 않는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숫한 유명한 분들의 지성보다, 역사는 그 여성의 깊이 기억 되었을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대학교와 시와 키운티의 이름을 지을 때, 어떤 이름을 붙일까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 같다. 비록 그분을 본 사람이 없을 지라도, 오늘까지 크라라 수녀의 섬김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일생의 마지막 주간 어느 날 저녁, 베다니에서 문둥병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 그 때, 한 여인이 순전한 값진 나드 향유를 가져와 옥합을 깨드리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비난하는 사람들, 특히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산타 크라라 대학교의 건물과 성당 위에 십자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자손을 남기지 않은 수녀일지라도, 그분의 아들 딸들은 수 천명 아니면 수 만 명이 그 학교를 통하여 일꾼이 되어갔다. 결국 섬기면서 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에 사는 모든 분들도 이 학교 교정을 분주하게 다니는 젊은이들처럼 활동적인 시절이 있었으리라.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유익을 준 분들이리라. 연인을 만나서 행복하게 팔짱을 끼고 교정을 걸은 추억들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 시간들은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한 순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는 정부 아파트가 아니다. 웨슬레안 감리교도들이 세운 재단에서 1975년에 건축한 것이다. 이 도시에 1851년에 최초에 생긴 대학이, 산타 크라라 대학과 웨슬레안 대학이다. 그 당시 칼리포니아는 금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열정을 가졌던 일꾼들이 있었다. 그 중에 죤 웨슬레의 복음 정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이곳에 온 것이다. 복음도 전하고, 일꾼을 세우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도 세웠다. 지금은 그 학교가 스탁톤으로 이사해서 University of Pacific 이라는 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추측하건대, 내가 사는 노인 아파트의 대지도 그 당시 웨슬레안들이 구입했을지 모르겠다. 그 웨슬레안들의 기도와 정성과 헌신의 헌금으로 11층의 말끔한 건물을 지어 수 많은 노인들의 마지막 여생을 아름답게 보살펴 준 것이다. 그분들의 열정과 나눔의 손길의 혜택을 내가 지금 누린다니 감개무량하다. 아마도 그분들이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지내게 될 줄 안 사람이 있을까? 이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거처를 마련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 뿐이다.

대학교 교정을 걸었을 때나, 지금 학생들이 많이 세 들어 사는 주택가를 걷거나 활발하게 걷고, 밝게 웃는 젊은 학생들처럼 우리 부부는 팔을 휘젓고 가슴을 펴고 기쁜 얼굴을 하고 걷기 위해 힘쓴다. 그래도 휘어가는 허리와 어그적 거리는 발걸음은 속일 수 없다. 그래도 이 나라의 미래를 젊은이들을 보면서 희망 가운데 걷는 걸음은 참으로 행복하다.

(주후 2011-04-15 씀)
Number Title Reference
8 리버티 타워 57호(8) 아침. 저녁 약 한 시간씩
7 리버티 타워 57호(7) 젊음과 늙음이 교차하는 곳
6 리버티 타워 57호(6) Five Star Hotel 같네요!
5 리버티 타워 57호(5) 한 밤의 비상
4 리버티 타워 57호(4) 하늘에 별 따기
3 리버티 타워 57호(3) 가능한 한 간단하게
2 리버티 타워 57호(2) 31X12=372
1 리버티 타워 57호 (1) 동부에서 서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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