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리버티 타워 57호
리버티 타워 57호 (1)
동부에서 서부로
2007년 6월 여러 해 떠났던 산호세로 다시 돌아왔다.
계획으로는 버지니아 쪽으로 가서 목사님들을 돕는 일을 하고자 했었다.
사위가 뉴욕의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직장 생활을 하고 싶어했고, 3살 된 딸 나오미와 새로 태어난 이반젤린의 성장 배경을 전원적인 환경으로 바꿔주었으면 하는 딸 부부의 바람이 있어서 버지니아나 노스 캐로나이나 주에 있는 직장들을 알아 보고 있었다. 마침 나로서는 함께 복음 증거 사역에 힘을 모으고자 하는 목사님들이 버지니아 주에 사시고 계심으로 그곳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한 세 차례 만나서 앞으로의 사역들을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위에 대하여 관심을 갖던 직장에서 결정을 계속 미루던 차에 내가 살던 도시 옆에 있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고, 즉시 와서 일해 주기를 바래서 식구들 보다 먼저 직장으로 가야 했다. 그 당시 우리 부부는 딸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 이유는 딸은 뉴 저지 호보큰에 살았고 우리 부부는 약 25분 정도 떨어진 리틀 훼리라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집사람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그래도 별일 아니려니 하고 있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첫 외손녀 나오미를 보기 위해 딸네 집으로 갔다. 엄마의 얼굴을 본 딸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군의관으로 있는 오빠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들어본 아들아이가 빨리 엄마를 응급실로 모시고 가라고 했다. 응급실로 가서 진찰한 결과 스트록이 약하게 지나갔다고 해서 입원을 서둘렀다. 다시 오면 더 큰 것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캘리포니아 기후에 익숙해진 집 사람이 동부의 추운 날씨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노쇠 현상인지 갑자기 닥친 일로 온 가족이 염려 가운데서 입원실을 오갔다. 아들 아이도 특별 휴가를 받아서 병원으로 왔고, 의사들과 여러 가지 상황을 의논해본 결과 상태가 아주 좋아서 재활 치료 없이 퇴원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한 쪽 손의 힘이 약해졌고, 말이 전처럼 또박또박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만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속한 교단 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세미나 등을 통하여 성도들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 가도록 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 협동 목사로 있었기 때문에, 미국 각지에서 세미나나 선교 대회 등의 모임 인도 초청을 받으면 여러 날을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집 사람이 풍을 앓고 난 이후부터는 혼자 두고 다닐 수가 없었다. 마침 가까이 사는 딸이 함께 살기를 바랬기 때문에 함께 모여 재미있게 살았다.

집을 팔고 이곳으로 이주한 딸은 일단 쿠퍼티노에 있는 집에 세를 들었다. 집 사람은 고향 같은 이 도시에 다시 온 것을 매우 기뻐했다. 이삿짐이 대충 정리된 후부터 사위와 딸이 집을 사고자 이리 저리 보러 다녔다. 그런데 이 지역은 주택 가격 하락과 관계없이 집 값이 매우 비싼 지역이다. 그래서 그 때 생각으로는 우리 부부 때문에 큰 집을 사게 되면 돈이 부족할 것이 뻔하기도 하고, 만일 직장을 옮겨서 다른 주로 떠나게 되면, 집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 오래 전부터 사귄 교우들과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집 사람에게는 다시 다른 곳으로 딸네 가족과 가는 것이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곳에서 Church Health Academy 사역을 시작했는데 이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리 저리 이사를 다니는 것이 불편하기도 한 일이다.

이곳의 몇 목회자들을 모시고 리더십 세미나나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성경 공부, 세미나등을 하는 데는 또 다른 곳에 가서 지역 교회를 섬기면서 긴 시간을 갖고 서로 신뢰를 쌓기에는 나의 사역 연령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도 딸네 가족과 몇 년 후일지 모르는 이동에 대하여 이곳에 있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기도했다. 물론 네바다 주에 사는 아들아이 부부도 언제나 오셔서 함께 살자고 하지만, 그 당시 아들은 물론, 며느리까지 군인이었기 때문에 아들 쪽으로 가는 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약 4년마다 근무지를 옮기는 데 그 때마다 새로운 환경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집 사람도 집사람이려니와 나도 사역을 하지 못하고 집에 있어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들네로 가는 일도 접어야 했다.
목회에서 은퇴를 했지만, 주님 앞에 가는 날 까지 분부하신 일꾼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는 연령과 상관 없이 건강이 허락하는 그 날까지는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딸과 아들과 의논했다.

우리 부부 때문에 집을 살 때 부담을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만일에 멀리 이사 가더라도 여러 여건상 엄마 아빠는 이곳에서 살며 사역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떠날 때라도 너희들이 너무 걱정 하지 않도록 미리 노인 아파트 입주를 위해 신청을 하겠다는 의논을 했다. 그러나 막상 의논은 했지만, 이 도시 사정에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하는데, 언제 입주할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주후 2011년 4월 5일 씀)
Number Title Reference
8 리버티 타워 57호(8) 아침. 저녁 약 한 시간씩
7 리버티 타워 57호(7) 젊음과 늙음이 교차하는 곳
6 리버티 타워 57호(6) Five Star Hotel 같네요!
5 리버티 타워 57호(5) 한 밤의 비상
4 리버티 타워 57호(4) 하늘에 별 따기
3 리버티 타워 57호(3) 가능한 한 간단하게
2 리버티 타워 57호(2) 31X12=372
1 리버티 타워 57호 (1) 동부에서 서부로
Page: (2/2), Total: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