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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산 안 창호' 평전에서 |
남강 이 승훈은 상인이었다. 그는 선천 오 치은 집의 자본으로 평양에서 인천 등지에서 상업을 경영하여 거상이 되었다.
그는 재산을 얻었으나 문벌이 낮은 것을 한탄하여 금력으로 양반집과 혼인을 하도, 자손을 위하여 경서를 준비하고, 고향에 서당을 설립하여 어떻게 하여서라도 그 자손을 하여금 상놈이라는 천대를 면하고 양반행세를 하게 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 집이 양반이 되려면 온 집안이 함께 양반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흩어져 있는 일가를 고향인 정주군 오산면 용동으로 모아서 천한 직업을 버리고 농사짓는 데 종사하고, 자제를 교육하도록 하고 남강 자신의 주택과 친족들을 위한 서당을 건축중에 있었다. 남강이 보기에는 양반촌에는 사랑문을 열어놓고 양객하는 현송지성(거문고를 타고 시를 읆는 소리)이 끊이지 아니하는 서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을 들었다.
"나라가 없고서 일가와 일신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가 없소" 하는 구절을 듣고 그는 도산과 면회아혀 도산의 민족론. 교육론을 듣고는 그날로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기 주택과 서재의 공사를 중지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오산학교에 썼으니 , 이것이 오산학교의 기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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